::: 반남박 인명사전 ::::::
선조님들의 행적을 기록한 작은 반남박씨 인물사전입니다, 기록한 내용들은 각 소종중
의 자료, 세보의 세적, 비갈 및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비롯하여 각종 인터넷백과사전 자
료 등을 참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종친 분들의 많은 참여와 자료제공을 부탁 드립니다.
참고로 앞부분 (예) 09-02-0057 은 9세 경신보 2권 57쪽에 등재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소재(所載)
나의 9대조(代祖)인 좌의정(左議政) 금천(錦川) 부원군[府院君 왕(王)의 장인(丈人) 또는 1등 공신(功臣)에게 주던 칭호] 평도공(平度公)이 세종(世宗) 4(1422)년에 별세하여 양주군(楊州郡)의 남쪽 중양포(中良浦)에 안장하고 75년 후인 연산군(燕山君) 2(1496)년에 산이 국용으로 수용되어 8월 임진(壬辰)일에 광주군 (廣州郡)의 북쪽 고다기리(高多岐里)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이장했으니 부인(夫人)과 쌍분이다.
공(公)의 휘(諱) 은(訔)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이다.
박씨(朴氏)는 본래 신라의 국조(國祖)인 혁거세(赫居世)에서 출래하고 신라가 망함으로써 자손이 여러 고을에 산거했는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을 얻은 분이 공(公)의 선조(先祖)이다.
증조(曾祖)의 휘(諱) 윤무(允茂)이니 양온령(良?令)이며 조부(祖父)의 휘(諱) 수(秀)이니 밀직부사(密直副使)이었다.
아버지의 휘(諱) 상충(尙衷)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이며 세칭(世稱) 반남선생(潘南先生)이다.
젊어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사우(師友)가 되었으며 후(後)에 학관(學官)을 겸임하여 함께 유교를 창입하고 고려 우왕(禑王) 초기에 간신 이인임(李仁任)이 국론을 마음대로 하여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할 때 선생이 두 번 상서(上書)하여 그의 비리를 극언하고 이인임(李仁任)의 처벌을 요청하니 간신들이 일제히 성내 곤장을 쳐서 유배시켜 길에서 별세하시고 조선 숙종 7(1681)년에 이르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서하고 제사하며 사당을 세워 표창하였다.
어머니는 증 진한국부인(贈 辰韓國夫人)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니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곡(穀)의 딸로 고려 공민왕 19(1370)년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도량이 출중하고 6세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도움 없이 컸으나 자라서 분발하여 스스로 독서할 줄 알아 외삼촌인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이 공(公)의 슬기로움을 시(詩)로 기록하여 기뻐하고 9세 때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에 임명되고 16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19세에 병과(丙科) 2등으로 급제했는데 과시 문제에 대응하는 답안이 매우 뛰어나 주시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그의 문장을 취하여 통례로 전교시(典敎寺) 교감(校勘)에 임명하고 후덕부승(厚德府承)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로 전임하였으며 태조(太祖) 1(1392)년에 개성부 소윤(開城府 小尹)으로 옮겼다.
조선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 했을 때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치적이 뛰어나 좌보각(左輔閣) 겸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고 얼마 후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종(太宗)이 세자로 있을 때 의기투합하여 매우 중히 여기므로 공(公)이 상서하기를,
“합하(閤下 정일품 벼슬아치에 대한 경칭)께서 평민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평민으로 응수하겠습니까?
합하(閤下)께서는 임금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국가와 존망을 함께하니 사생(死生)을 합하(閤下)께 기탁함이요.
아첨함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몇 년 후 사헌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계림윤(鷄林尹) 유공(柳公) 양(亮)이 항상 어떤 사건으로 공(公)을 모욕해도 공(公)은 굴하지 않았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공(柳公)이 항복한 왜인과 은밀히 인연을 맺은 혐의로 사헌부에서 치죄하는데 집정자는 공(公)과 숙원이 있어서 무사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고 공(公)이 사헌대에 오르니 유공(柳公)이 공(公)을 보고 머리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고 관리가 안건을 가지고 공(公)에게 나아가니 공(公)은 붓을 던지며,
“죄가 아닌 것으로 남을 모함하는 것을 나는 하지 않는다.”
말하고 서명을 하지 않아 유공(柳公)은 무사하였으나 이로써 집정자의 뜻에 거슬려 공(公)은 다시 지춘주사(知春州事)가 되고 태조(太祖) 7(1398)년의 변란 때 태종(太宗)이 오랫동안 불안 속에 있어서 공(公)이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태종(太宗)이 만류하고 결단에 참여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승진 임명되고 정종(正宗) 1(1399)년에 사수감(司手監) 지형조(知刑曹)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 해 박포(朴苞)가 반역을 도모했을 때 공(公)이 태종(太宗)을 도와 책략으로 협찬하여 역당들을 물리치니 인녕부(仁寧府) 좌사윤(左司尹)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에 임명되고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으며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서 얼마 후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그해 겨울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문관의 관직으로서 종 2품)으로 승진하고 형조전서(刑曹典書) 수문전직학사(修文殿直學士)에 임명되고 태종(太宗) 1(1401)년 나이 32세로 호조(戶曹) 병조(兵曹) 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으로 책봉되었으며 품계는 가정대부(嘉靖大夫 문관의 관직으로서 종 2품)로 승진하고 반남군(潘南君)에 봉작되고 다시 반성군(潘城君)에 봉작되었다.
다음 해에 강원도(江原道)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에 임명되고 태종(太宗) 3(1403)년에 한성윤(漢城尹)으로 옮기고 태종(太宗) 6(1406)년에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공(公)은 목사에서 감사에 이르기까지 부임한 곳마다 위엄과 은덕이 있었다.
이때 명나라가 환관 황엄(黃儼)을 보내 제주의 동불(銅佛)을 탈취하려 했는데 황엄이 욕심이 많고 포악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가 지나는 곳의 주민들이 매우 두려워했으나 공(公)만은 예절로 대우하니 황엄이 위엄을 거두고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했으면 돌아가면서 태종께 아뢰기를,
“전하의 충신은 박은(朴訔) 뿐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좌군도총제(佐軍都摠制) 동지총제(同知摠制)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에 임명되고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문관의 관직으로서 정2품)로 승진하고 황태후진번사(皇太后進番使)로 명나라에 갔으며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겸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공(公)이 사헌부에 재직할 때마다 기강을 진작시킨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때 좌정승 하륜(河崙)이 국무를 전결하여 다른 정승은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공(公)이 이런 불편함을 보고 문득 일어나 하공의 앞에 가서 힘써 간하여도 청한 것을 거절하면 공(公)도 서명하지 않아 하공이 몹시 꺼렸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전직하였다.
태종(太宗) 9(1409)년에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겸 의용순찰사사(義勇巡察使事)에 임명되고 서북순문찰리사(西北巡問察里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고 명을 받아 평양성을 신축하면서 60일 동안의 공사 기간 동안 한 사람도 매로써 다스리지 않았다.
태종(太宗)께서 관리를 보내 궁중의 술을 주고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의주의 백성이 실업자로 분주하니 금년의 조세 감면을 요청하옵니다.”
하니 태종이 특별히 윤허했다.
돌아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호조판서로 옮겼으며 고을 이름은 변천에 따라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작하고 다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여 죄수 처리에 힘써 실정에 맞게 하고 편벽되이 대중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으며 신문할 때 매질한 숫자에 대한 규정이 없음을 보고,
“채찍을 가하면 무엇인들 얻지 못하리오.” 하고
보고를 올려 신문할 때 매질을 1차로 30번을 가하도록 영구히 법식으로 정하여 계속 시행하였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옮겨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태종(太宗) 15(1415)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옛 헌장을 변혁 시키지 말도록 요청하니 태종이 가납하였다.
구제도는 이조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의 공로와 과실을 조사 보고했는데 공(公)이 관청을 신설하여 그대로 행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16(1416)년 공(公)의 나이 47세에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임명되고 다시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겸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 영경연사(領經筵事) 세자부(世子傅)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승진 임명되고 공신의 위에 동덕(同德)의 칭호를 더했으며 겨울에 이조판서를 겸임하고 세자사(世子師)로 승진하였다.
세종(世宗) 1(1419)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여 태상왕(태종)을 높이 봉작하기 위하여 책관(策官)을 드릴 때 공(公)이 처음 경연(經筵)을 열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고 항상 국가가 백성에게 조세를 거둠에 제한이 없음을 염려하여 당나라의 조세 균등법을 본보기로 삼아 백성의 부역을 균등히 하자고 청했으나 세종이 쓰지 않더니 그후 의정부에 내린 글에 왕이 잘못을 뉘우쳤다. 하였다.
세종(世宗) 3(1421)년 병으로 사직하고 부원군으로 집에 있을 때 태조 묘(太祖 廟)에 배향할 공신을 논했는데 부왕께서 남은(南誾) 이제(李濟)의 공(公)이 크므로 추배(追配)함이 옳다. 고 하였다. 고 유정현(柳廷顯) 허조(許稠) 등 군신들도 지지했으나 부왕은 김익정(金益精)으로 하여금 공(公)의 집에 가서 문의하였다.
공(公)이 대답하기를,
“남은(南誾) 등이 진실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으나 태상전하(太上殿下)의 대공지정(大公至正)으로 공직을 생각하고 죄를 사하여 태조(太祖)의 유지를 본받음이 온당합니다.”
하여 남은(南誾) 이제(李濟)가 추배(追配)하게 되었으며 세종(世宗) 4(1422)년 병이 더욱 심함에 태상(太上)이 의약과 임금의 수라음식을 나누어 하사하고 내옹인(內饔人 궁중요리사)을 공(公)의 집에 보내며 명하기를,
“조석의 반찬을 과인의 수라상과 같이하라.”
하고 병이 위독함에 태상도 불편했으나 중관(中官)을 보내 병세를 물었다.
공(公)은 태상의 병이 위독함을 듣고,
“노신(老臣)은 병으로 죽을지언정 태상께서는 만년수를 누리소서.” 하고
1422년 5월 9일에 별세하니 향년 53세요.
부음을 듣고 의례대로 조회를 중지했으며 다음날 새벽 태상께서도 서거하였다.
반양세고(潘陽世稿) : 박은(朴訔) 문집.
공(公)의 부인은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주씨(周氏)니 전법판서(典法判書)인 언방(彦邦)의 딸이며 3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규(葵)는 경상도 관찰사이며 차남 강(薑)은 좌익공신(左翼功臣) 금천군(錦川君)이며 삼남 훤(萱)은 경주부윤이며 딸들은 부사인 윤구(尹救)와 상호군인 김윤(金潤)과 관찰사인 이중(李重)과 판중추인 어효첨(魚孝瞻)과 각각 결혼하고 손자 증손 이하는 매우 번성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훗날 인성왕후(仁聖王后)와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인조(仁祖) 선조(宣祖)의 성덕(聖德)에 짝이 되었다. 이로써 후비(后妃)의 현숙한 덕행이 있는 가문이 되었다.
공(公)은 성품이 고상하고 훌륭하며 식견이 명달(明達)하고 의논이 확실하며 아울러 청신 글로 하여 내 외직을 거치면서 성적이 우수했다.
젊어서는 태종(太宗)께 예우를 받고 중년에 위난을 만났을 때 충심의 계책이 현저하여 왕의 참모로 참여하여 은혜로 대우받음이 특별하였고 모든 군국대무(軍國大務)를 함께 논의하여 비록 동료들은 듣지 못했어도 공(公)만은 듣고 알아 한 때 사심이 있는 줄 의심했으나 원인을 규명한 결과 그렇지 않았다. 장례드릴 즈음 세종(世宗)의 명으로 시호를 평도(平度)라 하사했으니 국가의 대법과 기강(紀綱)을 펴고 다스림을 평(平)이라 하고 마음을 의리로 제어함을 도(度)라 하며 관리를 보내 제사 드리는 제문에, “경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도량이 크고 깊으며 일찍부터 문장에 뛰어나 명성이 관리 명부에 현저하였다.
경제에 장기가 있고 헌법에 밝으며 시의에 통달하였다.
마음이 너그러우며 크고 뛰어난 풍채로 화합하기 어렵고 당당한 언론 본받을 만하며 목사로 등용하면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하였다.
사헌부에 두면 기강이 진작되며 관서에 뛰어난 업적으로 옛 번후(樊侯)보다 신속했으며 곤장의 수를 감한 인심은 소공(蘇公)의 형벌을 삼감에 부끄러움 없어 재판관으로 있을 때는 억울한 죄인이 없었으며 정승으로 재직 시에는 선정을 노래했다.
근본을 마음에 심음이 확고하여 빼어나지 못하고 영특함이 밖으로 발산하여 빛났었다.
처음은 나의 집에 마음을 쓰고 끝에는 성고(聖考 전왕)의 사령서에 좌명 하여 맹서를 나타내 백일(白日)이 그의 충성을 빛내니 직위가 조정의 으뜸 됨이 당연하여 이조에 전임하였다.
불선한 나는 어려운 자리를 이어받아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의 치적이 비록 판연이 빛나나 계승하기 어렵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은나라와 주나라의 개국 공신의 사업을 이어 받지 못했으나 국가와 기쁨을 함께하기를 바랐는데 어찌 하늘이 불공평함을 알리오.
경이 별세하던 날은 나에게 근심을 주는 때인데 부왕께서 서거하여 창자가 황급히 끊어진 것 같구려.
지난 행적을 생각하니 창연히 슬품이 일어 이미 은혜를 베풀고 시호를 주었으며 끝으로 기름지지 않은 음식으로 제사 드린다 하였으니 이것이 경의 출처뿐만 아니라 대체를 갖췄으니 군신간에 서로 마음이 맞은 때임을 볼 수 있다 라고 이른다.
조은선생문집(釣隱先生文集) : 박은(朴訔) 문집
아아! 성대로다!
처음 공(公)을 광주(廣州)에 장례 드렸는데 손(孫) 숭질(崇質)이 당시 호조판서로 묘갈과 묘지명을 저술했는데 두 문장이 장사한 년 월 일 과 자손의 관작만을 기록하고 공(公)의 실적을 나타낸 바 없었다.
이제 부득이 삼가 공(公)의 유장과 다른 글에 나타난 한두 가지를 모아 묘비를 만들어 신도(神道)의 동남쪽에 세워 후세 자손의 첨배한 자 이로 인하여 대략을 알게 할 것이며 연대가 오래되고 견문이 미치지 못하여 누락된 바 있으나 꾸밈은 없었으니 이것으로 정성을 다했다. 하겠다.
명(銘)에 이르되, 옛적 한나라 성제(成帝) 때 백마(白馬 지명)에서 창업하여 신인(神人)을 낳아 진한(辰韓)의 왕이 되고 1,000년을 지내오면서 자손들이 쪼개졌는데 기름지고 아름다운 금성(錦城) 남방(南方)의 으뜸이다.
아아! 우리의 선조 여기에 적을 두고 여기에 살면서 덕을 쌓은 경사 오래되어 일어났으니 높고 높은 문정공(文正公) 고려말에 출생하여 학문은 세상의 스승이며 충절은 세상의 으뜸인데 원흉(元兇)이 밀쳐냈으나 후에 융흥하여 시호를 주고 사당을 세워 모범이 되었다.
공(公)의 계승함은 인각(麟角)처럼 상서로워 국가의 명예를 윤택하게 하여 융성한 때라고 이름 높았다.
이때 성왕(聖王)이 백성을 편안히 구제함을 생각했는데 어찌 준걸(俊傑)한 신하가 없겠는가.
공(公)을 믿음은 심장처럼 친히 하고 수족처럼 여겼네.
참모로서 세운 책략 종용이 알맞게 행해져 내란 극복에 훈공이 누구보다 뛰어났네.
사헌부에 부임 판결이 귀신같고 목사 감사로 재직 시 찬란함은 양춘 같았네.
총재로부터 정승에 이르렀으며 마침 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처음 경연을 열어 진의(眞義)를 강론하고 백성의 부역을 생각하여 조세감면을 청했네.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천재일우(千載一遇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였네.
공(公)이 별세함에 태종도 서거하고 시호 주고 제사 드려 공덕을 기렸네.
후에 자손의 두 분 왕비 성왕의 짝이셨네.
우리 동성 중 누가 공(公)처럼 성대할까.
어찌 장례 드린 지 200년 동안 묘비가 깎여 지나는 자 눈물을 머금었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추가로 계양하노니 높은 산 긴 물처럼 내세(來世)를 비추리!
신도비명(神道碑銘) 10세손 세채(世采)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