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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고려 명신 박상충 첫 족보와 박미 성리학자 박세채 사변록과 박세당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노강서원과 박태보개화사상의 실천자 박규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태극기와 박영효
독립운동가 박찬익 청백리 공신(功臣) 암행어사
 
 



[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

연암 박지원

연암의 생애

연암의 사상

열하일기

연암의 저서

연암협. 안의현

연암 사적비

연암의 평생도

 

 

[ 연암 박지원의 평생도(平生圖) ]
1724년 영조 즉위
......................................
1737년 1세
*반남 박씨로 자는 중미仲美, 친지들은 미중美仲으로 부름, 호는 연암燕巖. 부친 사유師愈, 1703~1767와 모친 함평 이씨咸平李氏, 1701~1759의 2남 2녀 중 막내로 2월 5일(양력, 3월 5일) 축시에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 아현동쯤인 듯하다. 야동은 1850년대 방각본 고소설을 간행하던 곳이었다에서 출생. 조부 필균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지돈녕 부사를 지냈다. 선조 때의 명신인 박소朴紹이후 대단한 명문가였다.
1739년 3세
*형 희원 장가 듦. 형수는 이씨로 16세에 시집와서 연암을 잘 돌보았다.
*옛 사람의 선침온피扇枕溫被, 여름에는 부모님이 베개 베신 데를 부쳐 드리고 겨울에는 이불을 따뜻하게 하여 드림 같은 것을 흉내 냄.
1741년 5세
*경기도 관찰사를 제수 받은 조부를 따라갔다가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말함.
1744년 8세
사도세자(10세), 혜빈 홍씨를 왕세자 빈으로 맞음.
1752년 16세
*이보천의 딸과 결혼. 장인 이보천李輔天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의 <신릉군열전>을 배웠다. 이 시기에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어 칭찬을 받음.
1754년 18세
*우울증으로 시달려 음악과 서화, 골동품, 기타 잡물을 취미 삼고 객을 초대하여 해학과 고담을 즐김. <광문자전>을 짓고, <민옹전>의 민옹을 이 무렵 만남.
1755년 19세
*11월1일 처숙 이양천李亮天이 40세로 사망하고 연암의 정신적 방황과 편력이 시작됨.
1756년 20세
*봉원사에서 독서하면서 윤영을 만나 허생 이야기 들음. <허생>의 모티브가 여기서 이루어짐.
*이 무렵 <마장전>과 <예덕선생전> 지음.
1757년 21세
*가을에 <민옹전>을 지음. 이 무렵 불면증과 우울증이 깊어짐.
1759년 23세
영조, 정순왕후 간택(영조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 사도세자는 25세, 세손(정조)은 8세임)
*모친(59세) 사망. 「독례통고讀禮通考, 북학파 인사들의 관심을 모은 책」를 초抄함. 장녀(후일 이종목李鍾穆에게 출가) 출생.
1760년 24세
*조부(76세) 필균 사망. 연암의 곤궁한 생활이 이때부터 더욱 심화됨.
1761년 25세
*북한산에서 독서. 수염이 은백이 됨.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씀.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에게 주역 배움. 이 해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남.
*성균관 시험을 치러 들어가서는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 놓아 과거에 뜻이 없음을 보임.
1762년 26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음).
1764년 28세
*<초구기>를 지음. 이 무렵 <양반전>과 <서광문전후>를 지음.
1765년 29세
*벗인 김이중金履中, 1736~1793이 나귀를 팔아 연암에게 금강산 구경을 시켜 줌. 금강산을 유람하며 <총석정일출>을 지음. 이 무렵 <김신선전>을 지음.
홍대용,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연행. 12월 27일 북경 도착, 다음 해 5월 2일 귀향.
1766년 30세
*홍대용의 건정동회우록에 서문을 씀.
*장남 종의宗儀 출생.
1767년 31세
*이 무렵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을 지음.
*부친(65세) 사망(6월22일).
*삼청동三淸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셋집으로 이사.
1768년 32세
*백탑白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 탑골공원부근으로 이사. 이덕무李德懋,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으며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가 제자로 입문한다.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혹은 백탑파의 형성시기이다.
1769년 33세
* 이서구가 지은 녹천관집에 「녹천관집서」를 씀.
1770년 34세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
1771년 35세
*다시는 과거에 응시치 않았다. 연암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이 뒤부터였는데 주량이 무척 세었음. 장지 문제 발생하여 이상지李商芝, 1729~1799와 다툼.
*9월1일 큰 누이 사망하여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을 지음.
*이덕무, 이서구, 백동수白東修와 북으로는 송도, 평양, 천마산, 묘향산과 남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 단양 등지를 여행. 이때 연암골을 발견하여 ‘연암燕巖’을 호로 삼음.
1772년 36세
*여름철에 전의감동典醫監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피서. 광릉 석마향石馬鄕,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 일대에 있는 처가로 식구들을 보내고 전의감동 우사寓舍에서 혼자 거처함.
*박제가의 문집 초정집에 「초정집서」를 씀.
1773년 37세
윤 3월, 이덕무, 유득공과 파주 등을 거처 평양 유람.
1774년 38세
「제이당화題李唐畵」를 지음.
1775년 39세
12월. 정조가 대리청정.
1776년 40세
3월 5일, 영조 승하(82세) 3월 10일, 정조正祖 즉위, 홍국영 득세. 6월, 규장각 설치.
한객건연집 출간. 이 책은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齋家, 이서구李書九 등 4명의 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중국인 이조원이 ‘사가지시四家之詩’라 하여 ‘사가시집四家詩集’으로 더 유명하였다.
1777년 41세
*6월 하순, 장인 이보천(64세) 사망. 「제외구처사유안재이공문祭外舅處士遺安齋李公文」을 지어 추도.
1778년 42세
3월17일, 이덕무, 박제가 연행. 박제가 북학의를 지음.
*형수(형 희원의 아내로 연암의 어린 시절을 돌보았음) 사망. 형수를 위하여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을 지었다.
*7월, 홍국영의 화를 피해 연암 골짜기로 이주. 이유인 즉은 정조의 비인 효의 김씨가 생산을 하지 못하자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배치 해 놓고 원자를 얻은 뒤 득세하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연암이 이에 대한 상소를 올리나 정조에게는 전달 안 되었고, 이 사건으로 홍국영은 연암을 미워하게 되었다.
*개성 유수로 부임한 유언호가 생계를 살핌. 일시적으로 개성 금학동 양호맹의 별장으로 이주. 이때 유언호에게 빌린 돈 1000민을 양호맹, 최진관이 대신 갚았다.
1779년 43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된다.
1780년 44세
*2월, 홍국영 실각 후 4월에 사약을 받아 죽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溪에 있는 처남집에서 기거.
*5월 25일, 삼종형 박명원과 청 고종 70수연에 동행. 10월 27일 귀국. 연암은 열하일기 <산장잡기> ‘후지後識’에서 “평생토록 궤이함을 봄에 열하에 있을 때를 능가한 적이 없었다平生詭異之觀 無逾在熱河之時.”라고 그 놀라움을 적었다.
*귀국 즉시 처남 이재성의 집과 연암 골짜기를 왕래하며 2000여리 장정의 여행기인 열하일기 저술시작. 이 무렵 <허생>, <호질>을 지음.
*차남 종채宗采, 宗侃이라고도 함 출생.
1781년 45세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홍대용은 얼룩소 2마리, 공책 20권, 돈 200민緡 등을 보내면서 연암의 저술을 격려.
*9월, 박제가의 북학의에 「북학의서」를 씀.
*친구 정철조 사망하자 그를 위해 「제정석치문祭鄭石癡文」을 지음.
1783년 47세
*10월 담헌湛軒, 즐거운 집 홍대용이 노모를 핑계로 낙향하였다가 사망하니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을 지음. 홍대용의 염을 하며 반함飯含을 못하게 함. 이 충격으로 이후 연암은 음악을 끊었다.
*열하일기를 완성하였다.
1784년 48세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탈고하였다.
1786년 50세
*7월, 친구인 이조판서 유언호의 천거로 종 9품 벼슬인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건축물의 신축과 보수업무를 감독으로 오늘날의 공사감독관 격임에 임명됨. 연암이 음보蔭補로 처음 출사하자 노론 벽파의 실력자 심환지沈煥之, 정일환鄭日煥 등이 찾아와 자파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연암은 그때마다 해학적인 말로 쫓아낸다.
1787년 51세
*1월, 동갑내기 부인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1737~1787가 51세로 사망. 처음 시집와서는 선생의 조부 장간공의 집이 좁아 친정에 가 있었으며, 중년 이래 몹시 가난하여 자주 이사 하는 등 고생이 심했으나 잘 견디어 내었다. 집안 살림을 주도한 큰동서를 공경하여 우애가 좋았으며 큰동서가 후사 없이 죽자, 당시 십여 세 밖에 안 되는 아들 종의를 상주로 세우도록 했다. 한 번은 연암이 옷을 해 입으라고 돈을 주니 형님 댁은 끼니를 거른다며 집에 돈을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연암은 평소 이러한 부인 이씨의 부덕을 존경했으며 부인 별세 이후 종신토록 독신으로 지내었다. 부인의 상을 당하여 이를 애도한 절구 20수를 지었다하나 전하지 않는다.
*7월, 형 희원이 향년 58세로 사망하자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지음.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하다. 연암은 우암의 편지 중 윤휴의 일을 논한 대목에 전아典雅하지 못한 칭위稱謂가 있어 한두 자를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개탄한다.
1788년 52세
*3월, 일가족이 모두 전염병에 걸려 큰며느리가 죽고 장남 종의도 위독한 끝에 간신히 회생. 큰며느리가 죽자 주위에서는 살림할 사람이 없다고 연암에게 재혼을 권했으나 거절함.
*종제 박수원朴綬源이 선산 부사로 나아가 집이 비게 되었으므로 연암은 계산동桂山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잠시 머무른다.
*12월, 선공감 감역 임기 만료됨.
1789년 53세
*6월, 종 6품의 평시서 주부平市署主簿, 시장 상점의 두량검사斗量檢査와 물가등락을 관할하던 관청의 관리로 승진, 가을에 공무의 여가를 얻어 다시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1790년 54세
*삼종형 박명원이 사망하자 「삼종형금성위증시충희공묘지명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을 지음. 박명원은 연암의 재주를 아끼고 인정하였다.
*사헌부 감찰로 옮겼으나 ‘사헌부司憲府’라는 이름이 중부仲父, 중부의 이름은 ‘사헌師憲’와 같다하여 사양. 제릉령齊陵令, 태조太祖비妃였던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개풍군에 있다으로 옮김.
1791년 55세
*종 5품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으로 전보되다. 당시 흉년이 들어 곡상들이 쌀을 비싸게 팔거나 매점매석을 하여 곡가가 폭등했다. 이때 곡가를 억제하고 매점을 금지하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으나, 연암은 그러한 정책을 쓰면 상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쌀을 팔러 가 버릴 것이므로 도리어 쌀 품귀현상이 심해질 것이며 또한 서울에 이미 집적되어 있는 쌀의 방출을 막으면 다른 지역의 백성들이 굶주리게 된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곡가의 귀천과 곡물의 집산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연암의 견해가 채택됨으로써 그 후년의 기근에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12월, 유안준이 연암의 품계가 원칙이 없이 올라간다고 소를 올려, 종 6품으로 강등되어 안의현감安義縣監,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으로 제수除授, 천거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임명하는 것.
1792년 56세
*1월, 임지 안의에 도착. 안의는 거창현과 함양군을 이웃에 두고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5천여 호였다. 연암은 부임 즉시 송사를 엄격히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으며 관아에까지 출몰하던 도적들을 퇴치했다.
또한 연암은 함양군의 제방 보수공사에 고을 백성들이 동원되자, 행군 대형을 짜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여 공사를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매년 동원되는 폐단을 막았다.
*벗 김이소金履素가 우의정에 임명되자 「하김우상이소서賀金右相履素書」를 보냄. 이 편지에서 화폐유통을 바로잡고 은의 국외 유출을 막는 방안에 대한 의견 피력.
*문체반정의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
1793년 57세
*문체반정의 주동자로 지목하는 정조의 글을 갖고 남공철이 오자 연암은 자송문自訟文을 바침.
*1월 24일, 역시 문체 반정으로 지목당한 이덕무(53세)도 병중에 자송문을 바치고는 다음날 사망. 연암은 정조의 어명에 따라 「형암행장炯菴行狀」을 지음.
*이덕무가 죽자 그의 유고집 출간.
*유한준은 연암을 ‘호복임민胡服臨民, 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백성을 다스림’, ‘노호지고虜號之稿,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라는 말로 모함.
*봄에 도내에 흉년이 든 가운데 안의 고을이 가장 심하여 응당 공진公賑을 설치해야 했으나, 연암은 녹미祿米를 떼어 사진私賑을 설치했으며 조정에서 내린 초피貂皮, 등속도 받지 않고 공명첩도 돌려보내었다. 죽을 끊여 기민들을 구휼함.
*관아의 낡은 층고層庫를 헐어버리고 남과 북에 못을 파고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공작관孔雀館,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연상각烟湘閣 등의 정자와 누각을 지음. 담을 쌓을 때에도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벽돌을 구워 썼다. 이에 대해서 유한준이 비방하였다.
*<열녀함양박씨 병서>를 지음.
1794년 58세
*차원差員으로 상경하다. 특명으로 입시하여 안의현 및 연로의 농작 상황과 도내 민정들을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장남 종의가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려 하자, 이서구가 성균관장으로 있다고 편지를 보내 응시하지 못하게 함.
1795년 59세
가을에 차남 종채 혼인.
*9월 해인사를 구경하고 <해인사海印寺>라는 장편시를 지음.
1796년 60세
*3월, 임기가 만료되어 귀경. 서울에 돌아온 연암은 장차 저술 활동에 전념할 생각으로 계산동桂山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계동의 과원 하나를 사들여, 거기에 중국의 건축제도를 모방한 작은 집을 벽돌로 짓고 총계서숙叢桂書塾이라 명명하였다. 이 집이 곧 계산초당桂山草堂으로, 처남 이재성이 이사 와 살았고 이재성이 이사 간 뒤로는 아들 종채가 물려받아 평생을 보냈다.
겨울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에 임명. 얼마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의릉령懿陵令, 경종景宗과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으로 옮김.
수 년 동안 당뇨와 풍담風痰, 풍증을 일으키는 담, 정층증怔忡症, 가슴이 벌떡이는 증세을 앓음.
1797년 61세
*7월, 면천沔川, 지금의 충청남도 면천군 군수로 임명. 천주교 신자들을 회유시켜 개종하게 하여 신유사옥 때 면천군은 무사하였다. 이 무렵 제주사람 이방익李邦翼이 표류하다가 중국에 닿아 여러 곳을 둘러보고 귀국 하였는데, 그는 글을 몰라, 정조는 연암에게 일부러 그의 견문 내용을 글로써 바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지음.
1799년 63세
*정조의 어명에 따라 「과농소초課農小抄」와 부록 격인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바침. 이 저작으로 정조와 여러 신하들에게 칭송을 받음.
*봄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연암은 안의현에서 시행했던 예에 따라 사진을 설치하여 기민을 구제하였다.
*성 밖의 민전을 사서 가난한 백성의 입장을 허용.
1800년 64세
*정조 승하(6월28일). 연암이 몹시 호곡號哭하였다 한다.
*8월, 양양襄陽부사로 승진. 양양은 본래 문신이 임명되는 고을로 음관蔭官이 이에 임명되기는 연암이 처음이었다.
*9월, 양양에 부임.
1801년 65세
봄에 신흥사神興寺의 승려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이란 중이 궁속宮屬, 각 궁에 속한 원역員役 이하의 종과 결탁하여 내수사內需司, 왕실 재정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궁중에서 쓰는 쌀, 베, 잡물雜物, 노비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의 공문公文이나 궁가宮家,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대원군·왕자군·공주·옹주가 살던 집을 통틀어 이르던 말의 명함을 얻어내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심지어 관속을 구타하여 죽인 일이 발생했다. 연암이 이를 감사監司, 관찰사에게 알렸으나 감사는 꺼리는 바가 있었던지 흐지부지 하자, “관장으로서 궁속과 중의 무리에게 제어 당하며 백성을 어찌 다스리겠냐” 하고서는 병을 빙자하여 사직.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 생활이 되었다.
1802년 66세
*봄에 이광현李光鉉과 연암 골짜기로 들어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수개월을 머물다 돌아오다. 연암 골짜기로 향하던 날은 마침 차남 종채가 정시廷試를 보는 날이였음에도 연암은 개의치 않고 길을 떠났다.
*겨울에 조부 장간공과 부친의 묘를 포천으로 옮기려다 유한준의 방해로 좌절되는 변을 당하다. 이 사건 이후 연암은 울화병이 생겨 회복하지 못하였다.
1804년 68세
*여름이후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약 복용을 금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 하고 홍대용처럼 반함하지 말 것을 당부. 병중에도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이희경李喜經을 자주 불러 술상을 차려 담소하게 함.
1805년 69세
*10월 20일(양력,12월 10일) 아침 8시경에 가회방嘉會坊 재동齋洞,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재동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해 달라”라는 유명만을 남긴 채 서거하다. 연암이 세상에 머무른 지 예순 아홉 해째였다. 염습할 때 몹시 몸이 희었으며 평생에 가장 싫어한 말은 ‘구차苟且’였으니 숭 없는 삶을 살려는 표지였다. 경기도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 남향받이에 자리한 그의 아내 묘에 합장되었다.
그 날 분백粉白의 눈 꽃이 훨훨 날렸을 지도 모른다.
*1910년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
1805년
*12월 5일에 반남 박씨 선영이 있는 경기도 장단 송서면 대세현 남향에 자리한 부인의 묘에 합장.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1816년 박종채, 과정록 완성.
1835년 박종채 별세.
1876년 손자 박규수 별세.
1900년 연암집을 김택영이 간행.
1901년 연암속집을 김택영이 간행.
1911년 연암외집 열하일기 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
1917년 중편박연암선생문집을 김택영이 간행.
1932년 연암집, 대동인쇄소, 박영철이 돈을 대었음.
1955년 열하일기상, 북한의 국립출판사. 중은 1956년, 하는 1957년 간행.
1959년 열하일기상,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하는 1960년 간행.
1960년 박지원작품선집1, 홍기문 옮김,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조선고전문학선집25(2004년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로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냄).
1967년 국역열하일기, 이가원 옮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 1987년 중판.
1982년 연암집, 경인문화사(영인).
1983년 열하일기, 윤재영 옮김, 박영사 간행.
1986년 연암집, 계명문화사(영인).
1991년 박지원작품집1, 이상호 옮김,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조선고전문학선집66(2004년 열하일기상·중·하로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냄).
1991년 박지원작품집2, 이상호 옮김, 북한의 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조선고전문학선집67(2004년 열하일기상·중·하로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냄).
1997년 열하일기, 주단서 교점, 상해서적출판사.
2004년 신호열·김명호 옮김, 국역연암집 2, 민족문화추진회.

<간호윤(簡鎬允)교슈『개를 키우지 마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