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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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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족보 임오보(壬午譜)와 박미(朴彌) ]
반남박씨의 첫 족보는 임오보(壬午譜)로 1642년 (인조 20년)이며,족보 발행시 서문을 쓴 선조는 박미(朴彌)어른 이시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반남박씨 14세손이며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오창공 (梧窓公) 동량(東亮)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이며, 1592(선조 25) 출생하셨고 1645(인조23) 졸 하셨다. 반남박씨 문중에서는 분서공西公) 어른 이라고 한다.
임오보(壬午譜) 서문에서 박미는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내력의 문헌이 적어서 가까이 징빙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별조(別組)를 삼아 보첩을 만들었다. 그래서 근래에 영남에사는 종인(宗人)들이 보첩을 만든 것이 완미(完美)하였고, 대하(大夏)氏가 만든 보첩도 상세하긴 하였으나, 2가(家)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던차 영천군수로 있던 종형(從兄) 호(濠)氏가 앞장서서 회무(檜茂)氏등과 함께 종인들에게 창도(倡導)하여 집안의 보첩을 합쳐 정리하고 비갈(碑碣), 문집, 문헌, 휘일(諱日)등을 정리하여 집대성하였고. 1641년(인조19) 가을 종형 호(濠)氏로 부터 서문 부탁을 받고 서문을 쓰게되었고 했다.
박미는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 (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1605년 친공신적장자 (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 (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에 서용되었다.1638년 동지 겸 성절사 (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법은 중국의 오흥(吳興)을 따랐는데, 참판 박이서비(朴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과 교유하였다. 조카 세채(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었다.

■ 임오보서 壬午譜序 인조20 1642년
영남(嶺南)에 처음 군장(君長)이 없더니,육부(六部)의 대인(大人)이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를 물색하여 그를 받들어 임금을 삼았다. 처음에 그가 큰 알을 쪼개고 나왔는데 그 알의 크기가 박((瓢)과 같았다
. 우리나라 사람이 박을 박(瓢)이라 하였으므로 성을 박씨라 하니 해동(海東)의 박씨들은 모두 그의 후예(後裔)이다.
신라(新羅)사직(社稷)이 망하자.고려의 태조가 여러 박씨들을 열읍(列邑)에 나누어 흩어져 살게 하여 각각 판적(版籍)에 올렸는데,금성(지금 전라남도 나주. 조선시대는 본래 나주목이 였는데 인조때 일시 강등하여 금성현으로 한일이 있었다)의 반남현에 사신분 이 우리의 선조이시다.
우리나라 습속이 본래 문헌이 적어서 가까이 징빙할 수 있는 이로 별조(別祖)를 삼아 보첩을 만드니, 보첩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모처(毋慮) 몇집이 되었다. 그래서 근세에 영남(嶺南)에 사는 종인(宗人)이 보첩을 만든것이 자 못 완미(完美)하였고, 고(故) 목사(牧使) 대하(大夏)氏가 만든 족보도 상세하긴 하였으나, 이가(二家)가 서로 출입이 별 로 없었다.
나의 종형 영천수(榮川守) 호(濠)씨가 개연(嘅然)히 앞장서서 찰방 회무(檜茂)씨등과 같은 종인들을 창도(倡導) 두 보첩을 합쳐 리정(釐正)하니,첫머리에는 선세(先世)의 비갈(碑碣)과 뢰문(誄文)및 휘일(諱日)을 실어서 바로 그믈이 벼리에 매어 있듯 집대성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인조19 1641년) 가을에 회무(檜茂)씨가 종형(宗兄)의 명(命)을 전하면서 “보첩을 곧 상재(上梓)하게 되었으 니 그대가 서문을 지으라”하더니, 금년 동짓달에 종형이 또 서신을 보내와 보첩 일이 곧 준공(竣工)된다고 하며서 승낙 하길 몹시 급히 토책(討責)하였다. 부령(不佞)이 비록 우둔하고 글재주가 없으나 감히 명대로 아니하랴.
가만히 생각하건대 주(周)가 쇠미(衰微) 해지면서 부적(符籍)이 없어지고 보첩(譜牒)이 생겼다. 이를 성씨에 연계(連繫) 하면 합(合)함이 있고.이를 동종(同宗)에 통합하면 순서가 있게 되며, 전회(傳會)를 물리치고 삼유(糝糅)를 분간하여 오 직 명분을 바르게 분변하기에만 조심스럽게 하였다. 이는 일가언(一家言)을 만들어 국서의 미치지 못함을 보완하는 것이 니 이를 명명하여“돈사(惇史)“라 한들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동종(同宗)에게는 상세하게 하고, 이성(異性 )에게 간략하게 한 것과 같은 것은 이것이 우리 동종(同宗)을 위하여 만든 보첩 이기로서이니. 이는 로빈(魯賓)은 칠을 먼저하고 설(薛)을 뒤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고인(故人)이 세록(世祿)으로써 불후(不朽)라 하지 않았으니, 가령 종인들로 하여금 이 보첩을 보고 위연(喟然)히 선덕(先 德)에 대하여 생각함이 있어서, 유연(油然)히 약연(躍然)히 우리 조선들의 행정을 따르게 한다면, 입덕(立德).입공(立功). 입언(立言)이 넉넉하여 썪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장차 이를 어찌 피하겠는가? 만일 고금(古今) 사람이 서로 미치지 못 한다 하여 띠가 바람에 풍미하고 파도가 물결 따라 흐르듯 세상의 추세(趨勢)에 맡겨 떨쳐 쇄신(刷新)함이 없더라도 스스 로 현달(顯達)하여 상서롭지 않을 것이 없음에 크게 될 것이다.
이 보첩이 어찌 보대(葆大)를 다른데 돌리고 분화(芬華)만을 자랑하는 것이겠는가? 요컨대, 기왕(旣往)의 선조(先祖)을 빛 내고 방래(方來)할 자손을 면려(勉勵)하여 선의를 뒤따라 구문을 떨구지 않는 것은 선(善)의 선(善)인 것이다. 그리고 소목 (昭穆)을 순서있게 펴고, 소적(疏逖)에 까지도 반드시 미쳐서 꼭 믿어 전하고,꼭 징빙하여 믿게 하는 것이다. 돈목(敦睦) 의 신약(申約)은 종맹(宗盟)이 있으니, 무릇 우리 동맹(同盟)은 우호(友好)에 귀결되어 약속을 순순(諄諄)히 하면 영세( 永世)의 효시가 아님이 없을 것이다.
당세에 보첩을 논(論)함에 송대(宋代)에는 구양씨(歐陽氏)와 소씨(蘇氏를 말하고, 명대(明代)에는 이씨(李氏)와 교씨(喬氏) 를 말하나. 외람스럽지만 나는“그 지극한 것이 그 지극함에 못된다.”하겠다.예(禮)에 이르기를 “천도(天道)는 친속(親屬 )을 친(親)하는 것이다. ”하였다.
선조(先祖)을 높이기 때문에 동종을 공경(恭敬)하고 동종(同宗)을 공경하기 때문에 일족(一族)을 수합(收合)하며 궁극적 으로는 예악(禮樂)이 밝게 구비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이를 힘입는 것이니 이것이 주도(周道)이다.
또 이르기를“예(禮)란 것은 민중(民衆)의 벼리다” 하였으니 이는 주례(周禮)이다. 주례를 잡아 주도(周道)를 행하면 어 찌 반드시 그 사람이 없겠는가? 집집마다 주례 주도 있기를 날을 잡아 기다린다.
세사(歲舍) 임오(壬午인조 20 1642) 지월(至月동지달) 하완(下浣하순)에 금양군(錦陽君) 박미(朴瀰)는 두 번 절하고 씀
▣ 박호 (朴濠 )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백유(伯遊)이며,반남박씨 14 세손이고 남곽공(南郭公) 동열(東說)의 아들이다. 첫족보 서문을 쓴 박미(朴瀰) 와는 4촌 간이다. 1586년(선조19)출생하셨고 1667년(현종8) 졸 하셨다.
1626년 남평현감, 1631년 부여현감, 1638년 영주군수(재임 1638 ~ 1642), 1648년 호조정랑(戶曺正郞)으로 재임 되었으며, 1651년 남원목사, 1656년 군자감정(軍資監正), 166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 하였다.
▣ 박회무 ( 朴檜茂 )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반남박씨 13세손으로.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소고공 (嘯皐公) 승임(承任)의 손자이며 1575년(선조8) 출생 하셨고 1666년(현종7) 졸 하셨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자 의금부도사로 왕을 호종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소나무,전나무,매화,대나무,연,국화를 심고 애완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육우(六友)라는 호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천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