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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고려 명신 박상충 첫 족보와 박미 성리학자 박세채 사변록과 박세당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노강서원과 박태보개화사상의 실천자 박규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태극기와 박영효
독립운동가 박찬익 청백리 공신(功臣) 암행어사
 
 



[ 청백리 세양공 박강(朴薑) ]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반남(潘南)박씨 7 세손으로. 좌의정 박은(朴訔 평도공)의 둘째 아들이고, 반남박씨에서는 세양(世襄)공 어른이라하는데, 1406년(태종6)에 출생하셨다. 반남박씨 문중에서는 세양공(世襄公) 어른 이라고 한다.
성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1444년(세종 26)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이듬해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어 항시 이 직무를 맡고 있었다.
1449년 공조참의와 이조참의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황해도도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1452년(단종 즉위년) 중추원부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협력, 그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3등에 책정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하여졌다.1457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듬해 황해도도순찰사가 되었다.
시호는 세양(世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조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강(朴薑)이 졸(卒)하니, 쌀 콩 아울러 40석, 종이 100권, 유둔(油芚) 4부(部) 등의 물건을 부의(賻儀)하였다.
박강은 성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처음에 벼슬하면서부터 항상 군기감(軍器監)을 맡아 (判事)에 이르렀고, 이조 참의(吏曹參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호종하다가 길에서 병들어 1460년(세조6)에 졸(卒)하였다.
명을 받들어 옮기지 않는 것을 세(世)라 하고, 일로 인하여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한다.
선조 11년 1월 22일(갑술) 대행 왕대비의 선고에게 영의정을 추증하다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선고(先考) 박용(朴墉)에게 영의정만을 추증했고 조고(祖考)와 증조고(曾祖考)는 추증하지 않았다. 이제 지문(誌文)에 쓰게 되어 그의 손자 박원(朴源)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대신에게 의논해서 박용이 생시에 제수 받은 관작에 따라 그 부친에게는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를, 조부에게는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추증하였다.


[ 청백리 목사공 박병(朴炳) ]
조선 후기의 문신. 반남(潘南박씨 14 世 이고. 자는 소문(少文). 참봉공(參奉公) 동민(東民)의 세째 아들이며, 사간(司諫)인 백부 활당공(活塘公) 동현(東賢)에게 입양되었다. 1587(선조 20)년 출생하였고, 1663(현종 4)년에 졸 하셨다. 반남박씨 문중에서는 에서는 목사공(牧使公) 어른이라 한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성품이 대쪽같이 곧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며, 한번 싫다고 하면 비록 왕명이라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광해군의 난정에 과거 볼 뜻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독서로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반정 후 6품관에 초수(超授)되었다. 곡성현감을 거쳐 충훈부도사를 지내고 토산현감과 진위현령을 역임하였다.1636년(인조 14)병자호란 때는 천안군수로 있었는데 적의 침입을 보고 곧 군졸을 동원하려고 하였지만, 관찰사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좌절되었으나, 1644년 불법행위를 보고도 처리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공청도(公淸道)암행어사 유륜(柳倫)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얼마 뒤 철원부사에 서용되고 이어 사복시첨정과 임천군수. 청주목사 등을 역임한 뒤 향리에서 세월을 보냈다.
산소가 남북 분단으로 군사분계선 넘어에 계시기 때문에 반세기 동안 절향(絶享)중 늦게나마 후손들이 활당공 현손 필창(弼昌 1658~1734 ) 묘역옆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내포리 (옛 월정리역 샘통 철새도래지 근처 )에 2004년 6월 27일 망제단을 설단하고 매년 나주 호장공 시제 전 일요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강원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옛 철원 노동당사(鐵原勞動黨舍)바로앞 길옆에 박병(朴炳) 목사공(牧使公)공적비 가 있으며, 목사(牧使)를 지내셨던 충남 공주시 산성동 공주공산성(公州公山城)에도 박병(朴炳) 목사공(牧使公) 공적비가 있다.
■ 박병묘갈명(朴炳墓碣銘)
송시열(宋時烈) 찬(撰), 이진순(李眞淳) 서병전(書幷篆), 1734년(영조 10) 2매, 탁본(拓本), 182 X 95 cm
소재지는 강원도 철원이다.
조선 인조대 문신인 박병(朴炳 1587-1663)의 묘갈명(墓碣銘)이다. 송시열이 찬한 묘갈을 년(영조 10) 박병의 현손인 사수(師洙)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새긴 것으로 찬(撰)할 때의 연기는 분명하지 않다. 탁본은 오김탁(烏金拓)이며 탁본상태는 선명하지 않다. 탁본의 윗부분에 公州牧使贈吏曹參議朴公墓碣銘(공주목사증이조참의박공묘갈명)"이라는 전서체(篆書體)로 기록된 글이 있고 묘갈명은 有明朝鮮國通訓大夫公州牧使贈通政大夫吏曹參議朴公墓碣銘(유명조선국통훈대부공주목사증통정대부이조참의박공묘갈명)"으로 시작된다. 송시열이 찬한 묘갈다음에 박사수(朴師洙)가 비석을 후에 세우면서 박병에게 내려진 증직과 후손들을 기록한 것이이어진다. 묘갈 내용에 따르면 박병(朴炳)의 본관은 나주(羅州 반남박씨를 처음에 나주박씨라고 했음)이며 자는 소문(少文)이다. 금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남창(南窓) 금현성(金玄成)에게도 배웠다. 광해대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인조 즉위 후 품직을 제수받아 곡성현감(谷城縣監)을 시작으로 토산현감(兎山縣監), 충훈도사(忠勳都事), 진위현감(振威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진위현감으로 있을 때 종실인(宗室人)의 무뢰함을 고하였다 파직되었고, 1636년 피천(被薦)되어 재등용되었다. 병자호란 때 천안현감(天安縣監)으로 있었는데 군사를 동원하려 하였으나 관찰사의 불허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철원부사 사복시 첨정,임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