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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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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변록과 박세당(朴世堂) ]
조선 후기의 학자이고 문신으로. 반남(潘南)박씨 15세손이며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西溪)이다. 좌참찬 서포공(西浦公) 동선(東善)의 손자이며 이조참판 정(炡)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1629년(인조 7)출생 하고 1703년(숙종 29)졸 하셨다. 반남박씨 문중에서는 서계공(西溪公) 어른이라고 한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양주윤씨(1597∼1649)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현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물러났다.
그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는 하였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태유(泰維)와 둘째아들 태보(泰輔)를 잃게 되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만 힘썼다. 그뒤 죽을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하였다 하여 노론(老論)에 의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생활을 통한 개혁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그의 생애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던 시기이었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그의 근본사상에 대하여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하여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근본입장이 당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태도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뿐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하여 사상적 자주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하였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그와 윤휴(尹鑴).윤증(尹拯)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을 비판함에 있어서 공통적이었지만 그들의 학문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즉,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南人)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하여 채용해보려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사상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계통이었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하였던 도가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스스로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그가 이러한 학문경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안정과 국가를 보위하는 데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서지방(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양반지배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는 요역(#요18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하였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하였으므로 혁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하였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추구에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朴尙衷)에 관한 평가에 있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로서보다는 원나라.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였던 데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던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대내외정책에 대한 개혁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사서와 《도덕경 道德經》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하여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하여 그 본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하였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여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유가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하여, 공자가 말하는 ‘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는 ‘왕도(王道)’를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하여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하여,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이고,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으나, 그는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도심(道心)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하였던 것이니, 이는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그는 도를 밝힌다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것을 다스리려 하여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백성의 생활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장학도 그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사상이 차별사상이 아니고 민중중심적인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지배욕구의 포기를 그 근본으로 하는 것이 《도덕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태도이며,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현실에 전연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그는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하여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그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2000. 4.17) 장암동 197번지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배치로서 집 앞 어귀에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 자, 학당터 및 그 뒤의 영당과 묘택 등의 일곽이 조선후기 사대부 건축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적, 문화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란 당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이원형을 유지하여 남아 있고 나머지 건물은 부분적으로 현대식의 건물이 세워져 후손들이 살림을 하고 있어 전체적인 가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한편, 1999년 8월에 경기도 전통종가로 지정됐고, 2000년4월17일에 사랑채가 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 西溪先生集》과 《대학》.《중용》.《논어》.《상서》.《시경》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 1책과 《남화경주해산보 南華經註解刪補》 6책이 전하며,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색경 穡經》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