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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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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

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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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熱河日記) ]
○ 열하일기의 문체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자신의 사상을 집성해 놓은 것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의 사상이 고루함을 지적하는가 하면 소설형식을 빌어서 허황된 명분에만 사로잡혀 있는 실력 없는 지배계급 무리들을 비웃고 있으며(虎叱.許生傳) 명분이야 어떻든 조선보다 탁월한 문화를 가진 청나라의 문물,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생활기술(이것들을 北學이라 한다)의 습득을 주장하였고 그밖에 청조의 여러 사정에 대해 극히 예리한 관찰을 하고 있다.
이 일기는 당시 일세를 풍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힘으로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하나의 「반열하일기운동(反熱河日記運動)」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문제거리가 되었었다. 그밖에도 그는 몇 개의 소설에서 속물들(兩班)을 통렬히 풍자하여 그들의 가식과 허세를 공격하였으며(穢德先生傳.兩班傳 等) 또 서얼(庶孽)을 차별할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시류(時流)를 통렬히 비판하고 풍자하며 헛된 명분보다 실제적인 것을 요구한 박지원의 인품은 어떠하였는가. 박지원의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는 몸이 비대하여 더위를 타는 그가 금천의 무더위와 모기를 피하여 서울로 왔을 때의 생활을 그린 것인데 그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골서 편지가 오면 평안(平安)이라는 두 글자만 보고 만다. 나는 본디 성품이 게으른 데다가 이 철에는 더욱 게을러져 경조(慶弔)의 인사치레도 전폐하는가 하면 며칠씩 세수도 안하고 열흘 동안이나 망건도 안쓴다. 손님이 와도 아무 말없이 대좌(對坐)만 하는가 하면 지나가는 장사아치를 불러 세워놓고는 누누이 효(孝)가 어떠니 충(忠)이 어떠니 뇌까리기도 한다.
다리 부러진 어린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면서 친구처럼 사귀어 서로 장난하는 것도 재미있다. 졸다가 책보고 책을 보다가 졸고 해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다(서울 집에는 자기 혼자 와서 있었다.) 그래서 진종일 낮잠을 자기만 하는 날도 있었다. 더러는 글로 쓰고 혹은 새로 배운 철금(鐵琴)을 뜯기도 한다.
술이 있으면 취하여 자화자찬하기를 위아(爲我)함은 양자(楊子)같고 겸애(兼愛)함은 묵자(墨子)같고 가난함은 안자(顔子)같고 할 일 없이 날을 보내는 것은 노자(老子)같고 생각이 활달함은 장자(莊子)같고 참선함은 불타(佛陀)같고 불공(不恭)함은 유하혜(柳下惠)같고 술 잘하는 것은 유령(劉伶)같고 남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은(이때 밥을 해주던 여종이 도망가서 사람을 사서 식사를 하였다.) 한신(韓信)같고 졸기 잘하는 것은 진단(陳摶)같고 거문고를 뜯는 것은 자상호(子桑戶)같고 저서(著書)는 양웅(揚雄)같고 자신을 갖는 것은 제갈공명(諸葛孔明)같으니 이렇게 옛 명인의 장점과 특점을 한 몸에 지닌 나야말로 성인이라 할만하다. 다만 키가 조교(曺交)만 못하고 청렴함이 어릉중자(於陵仲子)만 못하니 이것이 결점이라면 결점이 될까.」
이 유머러스한 자화상에서 우리는 근엄(謹嚴)을 씹고 사는 이른바 선비와는 아주 다른 현대의 문학청년적인 기질과 인품을 볼 수 있으니 그의 사고의 유연(柔軟) 신축(伸縮)함과 허식이나 명분을 싫어함은 이런 글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우머가 그의 인품의 전부는 아니다. 불우한 처지에 대한 절실한 자탄과 울분이 유우머의 뒷면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답족손홍수서(答族孫弘壽書)’는 홍수(弘壽)라는 족손(族孫)이 스스로의 억울함과 원망스러운 처지를 말해 온 것에 대한 박지원의 답서(答書)인데 이 가운데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뜻밖의 편지를 받아보고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내려 온 종이를 다 적시었노라. 그대가 당하는 괴로움은 이미 내가 옛날에 다 겪은 것이기에 한층 가슴 아프고 슬프기만 하다. 오호라! 세상의 빈사(貧士)는 천만가지 원통함, 억울함을 지니면서도 끝내 그것을 펴보지 못하는 법이다. 한 성의 성주가 되어 나라를 위해 성을 지키다가 강적의 공격을 받아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면서도 끝내 뜻을 안 굽혀 옥쇄(玉碎)할지언정 항복하지 않는 것은 지킬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빈사의 고절(苦節), 간난(艱難)도 그러한 열사(烈士)의 경우와 실은 다를 바 없다. 그에게도 지킬 뜻이 있는 것이다. 비록 도덕적인 수양이 미흡하고 가난에 시달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그 뜻만은 어찌 딴 사람만 못할까 보냐!」
천하를 향한 남다른 뜻을 가졌으면서도 그 뜻을 펼쳐 볼 길이 없어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의 고뇌가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케 하는 바가 있다. 이 편지의 끝에는 그 자신이 한글을 알지 못해 50을 해로한 아내와 한번도 편지를 주고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고 적고 있어 그의 성실한 일면도 보여주고 있다.
박지원과의 교분이 있었던 남공철(南公轍)의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은 박지원의 일족 박남수(朴南壽)에 대한 추억의 일절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역시 박지원의 성정의 일면을 잘 묘사한 구절이 있다.
「내가 연암 박지원(朴趾源)과 함께 남수의 집 벽오동관(碧梧桐館)에 간 일이 있는데 그 자리에는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도 와 있었다. 달이 밝은 밤에 연암은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낭독하였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무말 없이 듣고만 있었지만 남수가 불쑥 연암에게 대들어 하는 말이 “선생의 글이 비록 훌륭하긴 하지만 경학(經學)의 본도(本道)에 맞는 고문체(古文體)가 아니고 이야기책 식의 글인바 이 열하일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문장이 모두 고문을 버리고 이야기책 식의 것이 될지도 모르니 큰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수의 말을 묵살하고 그냥 낭독해 내려가니 남수는 술 취한 기분에 열하일기에 촛불을 대어 불태워 버리려 하였다. 박남철(南公轍)이 말하기를 내가 급히 말려서 무사했지만 연암은 성내어 드러눕고 말았다. 내가 연암의 화를 풀려고 해도 그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연암은 정색하고 앉아 남수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남수(南壽)야 내 앞으로 오너라. 나는 이 세상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궁(窮)한지 이미 오래다. 마음 속의 크고 작은 불평을 모두 문장에 의탁하여 제 멋대로 쓴 것일 뿐이다. 난들 그러한 글 쓰는 것이 기뻐서 쓸가보냐. 그대와 남공철(南公轍)같은 이는 모두 아직 젊고 재질이 풍부하니 문장을 배우더라도 내 것을 닮지 마라. 그리하여 정학(正學)의 진흥에 힘써 나라에 이바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서는 “자 이제 내가 여러분을 위해 벌주(罰酒)를 들겠다.”하면서 큰 잔을 기울여 크게 취하고 말았다.」
열하일기는 그 문체가 패관소품(稗官小品) 즉 이야기책 유의 것이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열하일기의 높은 인기가 고문 진흥에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였다. 그러나 박지원이 정학 즉 주자학적인 정통 유가사상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다. 뒤에도 말하겠지만 그는 정학의 지상목표인 정덕(正德)의 달성을 궁극 목표로 하여 그 실현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통하여 허(虛)를 버리고 실(實)을 좇는 방법에 의해야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열하일기도 실은 그 방법가운데의 하나였던 것이다. 불우하여 뜻을 펴지 못했기 때문에 열하일기를 통해 울분을 터뜨렸다는 그의 실토, 그 울분이야말로 박지원다운 점이다. 박지원과 친교가 있었고 또 그가 경애하던 선배 홍대용(洪大容)에게 쓴 그의 편지 ‘답홍덕보서’에 정기(正氣)와 객기(客氣)를 논한 구절이 있는데 이것 역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심정을 말한 것이다. 이 편지에서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인의 가르침은 인간의 객기(客氣)를 제거하라는 것인데 객기를 제거하고 정기(正氣)를 드러내는 데는 극기(克己)가 제일 필요하다. 나의 평생은 언제나 이 객기가 병이 되고 있다. 나의 오관(五官)은 모두가 도둑의 소굴이요, 지의(志意) 언동은 객기의 성사(城社)이다. 근자의 나는 극기로써 객기 제거에 힘쓰지 아니하며 더구나 그 객기마저도 소락(消落)해 버리고 있다.(객기가 활동하지 않음으로 제거 대상이 없어진 일종의 허탈상태를 말함)」
박지원이 말하는 객기(客氣)란 당위(當爲)를 뜻하는 정기(正氣)와 대조되는 현상(現像)존재, 즉 인간적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가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예(禮)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자기가 본래 갖고 있는 선천적인 선량한 감각이다. 그런데 이 천상에 객기가 침범하는 것이다. 객기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이(理)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객기가 곧 울분이니 한대(漢代)의 대사학자 사마천(司馬遷)이 불후의 역사서(歷史書) 사기(史記)를 분(憤)으로 지었다고 할 때의 분과도 통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자기의 정당한 뜻이 곡해되어도 그것을 소설(昭雪)할 길이 없어 그 분(憤)을 가지고 인간의 진실을 기록하는 사기를 지었던 것이다.

○ 청조(淸朝)에 대한 견해
북학론자는 오랑캐 왕조인 청나라 문화라도 그것이 우수한 것이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문화를 관찰하고 소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청나라 학자들의 실증적 학문 태도와 그 성과도 따라서 배우게 되었다. 북학론자의 특성은 이러한 사고의 유연성(柔軟性)과 현실성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그렇게 바랐던 연경 여행을 하게 된 박지원은 기쁘고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남만주를 통과하던 어느 날 말 위에서 졸다가 낙타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그는 분연히 “앞으로는 무엇이든 처음 보는 것이 있으면 잠을 자건 밥을 먹건 반드시 와서 일러라.”하고 하인에게 당부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탐구심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무엇이든 세심히 보려 하였고 이야기할 상대를 찾으려고 애썼으며 그러므로써 청나라 왕조의 허실과 한문화의 실태를 파악하려 한 것이다. 경학(經學). 사학(史學)에 관한 그의 풍부한 지식은 그러한 탐구심을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것으로 만들게 하는데 충분하였다.
길에 보이는 농부의 노동하는 모습에서, 지나가는 수레에서 농업의 규모와 정부의 농업정책을 살피는가 하면 참외장수와의 간단한 대화를 통해 한인(漢人)과 만주인의 성정(性情)의 차를 간파하려 하는 등 세밀한 관찰력을 동원하기도 하고 창조의 대외정책, 문교정책, 관리의 기강 등에 대하여도 매우 폭넓은 통찰을 잊지 않았다. 열하일기의 심세편(審勢編)에 보이는 천하의 대세 등에 대한 그의 폭넓은 대국적인 안목이야말로 연경을 다녀간 다른 수많은 인사들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일행이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도착하였을 때 건륭황제는 막북(漠北)의 열하(熱河)로 피서중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다시 열하로 가게 되어 박지원은 일행과 다른 코오스로 갈 수 있었고 거기에서 거인(擧人) 왕민호(王民皥)와 같은 교우를 만나 흉금을 터놓을 수 있었다.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만난 인사 중에는 홍대용, 박제가의 경우처럼 당대의 명류들은 들어있지 않다. 그러니 만큼 중원의 학술대세(學術大勢) 등에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왕민호라든지 그밖에 윤가전(尹嘉銓) 등 벼슬이 없는 선비나 혹은 그리 높지 않은 관료 등과의 접촉에서 오히려 청조의 한인(漢人) 사대부 일반의 동태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왕민호와의 필담(筆談)은 혹정필담(鵠汀筆談)이라는 일편을 이루고 있을 만큼 교담(交談) 내용이 풍부하고 또 의미 깊은 것이다.
박지원도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조를 이적으로 보는 점에 있어서는 다른 조선인과 마찬가지였으니 이것은 왕민호에게서 한인의 반청사상(反淸思想)을 캐려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조선인처럼 한인(漢人)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여 쾌감을 느끼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대개의 사람은 조선의 의복을 보이면서 너희들은 호복(胡服) 즉 만주족식(滿洲族式)의 옷을 좋아하는가, 혹은 만주족 결발(結髮)로 앞은 깎고 뒷머리를 딴 치발(薙髮)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명나라가 그립지 않느냐는 등 직접 묻고 상대방의 대답이 막히는 것을 보고 좋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대부(士大夫)가 도대체 무엇이냐. 예맥(濊貊)의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느냐. 의복이 명대의 것과 닮았다고 자랑하나 그것은 실은 상복(喪服)이 아니냐.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자랑하나 상투는 남만(南蠻)의 풍속과 같지 않으냐. 그것이 무슨 예법에 맞는 자랑거리라도 되느냐. 한인들의 호복(胡服)은 그들도 부끄러워하는 터이지만 그밖에 예속(禮俗)에 있어서는 여전히 천하에 으뜸이다. 티끌 만큼도 그들보다 나은 것이 없으면서도 상투 하나 가지고 잘난 체하다니 말이 되느냐. <玉匣夜話 審勢編>
박지원이 알고자 한 것은 한인들이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다면 어떠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합리화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알아낸 것은 한인이 이민족의 지배를 결코 달가와 하는 것은 아니나 명분보다도 실질적인 것은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론적 근거는 정통사상(正統思想)이 명분을 좇아 진시황이나 상앙(尙鞅)을 배격하나 실제에 있어서 후대의 국가규모는 진시황이나 상앙이 만든 것을 좇은 것이 아니냐 하는(명분으로 보아서는 청조가 오랑캐 왕조이나 실제로 정통왕조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으로 발전한다.)현실적 사고인 것을 알아냈다.
왕민호의 이와 같은 사상과 청나라 초기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사상의 영향을 입은 박지원은 역사상 폭군으로 이름 높던 걸왕(桀王)이나 주왕(紂王) 또는 큰 일을 이룩한 진시황이나 상앙은 자기들이 이룩한 업적의 혜택을 그들 자신은 받지 못하고 오히려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그들을 비난한 후대인에게 돌아갔다는(虎叱에서)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주자학을 고루하게만 지켜오던 조선인으로서는 실로 대담한 역사론을 전개하는 한편 청조치하에서 생장한 사람은 청나라의 신민이니 마땅히 청나라에 복종해야지 그렇지 않고 외국인에게 딴 말을 한다면 그야말로 조선인의 청조멸시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경서(經書)인 춘추(春秋)가 탓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아니냐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의복이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고금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니 시속(時俗)을 따라 개변할 수 있는 것이며 호복(胡服)도 시속을 따른 의복으로 볼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발전하여 청나라 존재의 현실성을 승인하기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청나라가 이적(夷狄)의 왕조일지라도 그 문화는 배워야 한다고 결론짓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또 셋째 번 청나라의 대세에 관해서도 뛰어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청나라 왕이 열하로 피서 가는 것은 단순한 피서가 아니라 몽고를 제압하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청나라가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아 권장하나 이는 한인을 통제하려는 방법이니 이는 한 손으로 등을 만져주면서 동시에 한 손으로는 목을 누르는 것과 같다고 보는가 하면 청나라의 학자간에 주자학이 부진한 것은 주자학을 청나라 정부가 과학으로 삼은 데 대한 반발이라고 보기도 했다.
또 대규모의 문화사업인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이 실은 한인(漢人) 학자들을 도서편찬에 몰두시켜 반청사상(反淸思想)으로 발전할지도 모를 이론적 연구를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는 등 오늘날의 사학의 수준과 맞설 수 있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청나라문화와 관련한 당시 조선인의 고루하고 편협된 면에 대한 비판과 그의 실학사상은 다음에 말하겠거니와 이상으로만 보더라도 ‘열하일기’가 큰 문제거리로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열하일기의 영향
과연 열하일기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사(轉寫)되어 읽히게 되자 그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 식견에 탄복하는가 하면 그 유연성 있는 리버럴한 사고를 공박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일으킨 문체반정(文體反正)운동은(1792) 그 영향의 한 표현이었다. 문체반정이란 당시 유행된 문체가 지나치게 산뜻하고 멋을 부려 명청(明淸)의 패사(稗史), 소설 따위의 문체를 모방함을 억제하고 경서(經書)의 문체(古文)와 같이 근엄한 것으로 되돌아가게 하자는 것인바, 이는 단순히 문체 그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문체를 낳은 비판적이고 리버럴한 사고방식을 억제하자는 것이 그 초점이었다.
이와같은 자유주의적 사고는 정통사상(正統思想)인 주자학 자체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에 있어 정조는 멋 부리는 문체를 낳는 마음은 사학(邪學) 즉 서학인 천주교에로의 관심을 유발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멋 부리는 문체를 공박한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의 상소문에도 그러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문체반정운동은 그밖에 당시의 당쟁과도 관계가 있었다. 즉 그것은 반대당 공격의 재료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 당쟁의 밑바탕에는 서학의 문제가 개재해 있었던 것이다. 문체의 순정화(醇正化)를 위해 그 주동 인물들에게는 자송문(自訟文)의 제진(製進)을 명하였고 한편으로는 청나라에서 도서를 구입하는 것과 청나라 사람과의 필담(筆談). 서찰(書札) 왕래 등을 금하게 하였다.
그 주동 인물이란 다름 아닌 박지원이었던 것이니 정조는 “근래의 문풍(文風)이 나빠진 것은 그 근본이 박지원에게 있다. 열하일기는 나도 세밀하게 읽어보았지만 정말 문제 거리의 책이다. 열하일기가 널리 읽히면서부터 문체가 나빠졌으니 박지원에게 그 책임을 지우고 스스로의 죄를 스스로 풀게 하라(古文體의 文章을 지어올려라)”라고 하였다.
박지원 외에 그와 뜻이 통하던 박제가 이덕무 그리고 정조의 총애하는 신하(寵臣) 이가환(李家煥)도 문책.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의 이 명령에 따라 박지원은 자기의 문체가 반드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사과함과 아울러 2.3년에 과농소초(課農小抄)라는 농서를 지어 올렸다. 그의 실학적(實學的) 관심이 농업면에의 반영이기도 한 과농소초는 세평은 좋았으나 일부 인사들로부터 여전히 문체불순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문체반정도 실은 열하일기의 내용 전반에 걸쳐 그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지만 그 직접적인 공격은 그가 열하일기 속에 청나라의 연호를 썼다는 점에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멸시하고 명나라를 숭앙하는 표현으로서 공문서 이외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최후의 연호인 숭정(嵩禎)기원 후 몇 년 식으로 썼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오랑캐의 연호를 열하일기 속에 직서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곧 청나라에서 배울 것은 배우자는 태도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도 명나라를 숭앙하고 청나라를 이적으로 보는 점(멸시는 안하지만)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으니 숭정연호를 쓴다는 것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일기의 기년(紀年)을 위해서는 맨 첫 번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하여 숭정 기원 후 삼주째의 경자년의 뜻으로 쓰고 있으며 다만 숭정 두 글자를 뺀 것은 청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일을 기록하는 문장에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쓸 수는 없었다. 이 비난에 대하여 그는 분연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대체 한낱 기행문에 춘추(春秋)의 사필(史筆)을 요구하다니 말이 안될 뿐 아니라 당당히 일시(日時)룰 적을 때는 숭정 연호에 준거하였는데 무슨 소리냐. 문장 속에 청나라의 연호가 나온다 하여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조선서도 일시를 명백히 하기 위해 매매 문서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으며 나도 청나라의 일을 적는데 일시를 밝히고자 청나라의 연호를 쓴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왜 오랑캐의 연호가 붙은 문서로 산 집이나 논밭에서 살며 농사를 지어먹는가! 나의 일기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를 공박하되 그 곳에는 중화(中華)의 본질인 고래의 문물이 남아있어(비록 이조하(夷朝下)이기는 하나)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할 수 있는 양법(良法), 미제(美制)가 적지 않은데 왜 더 상세히 보고 기록하여 나라에 유익하게 하지 않았느냐고 일기의 내용의 빈약함을 책한다면 또 모르되 춘추의 의리(역사서술에 있어 이적(夷狄)을 배척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비난하다니 될 말인가!

<金聲鎭) 咸陽文化院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