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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

연암 박지원

연암의 생애

연암의 사상

열하일기

연암의 저서

연암협. 안의현

연암 사적비

연암의 평생도

 

 

[ 연암의 사상(思想) ]
1. 연암의 실학사상(實學思想)
1) 이용후생( 利用厚生)
연암은 사회 제반 영역에서의 물질적 토대의 선차성을 충분히 인식한 기초상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이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자기 글의 여러곳에서 이용후생의 도리, 이용후생과 사회적 질서, 도덕과의 선후 관계의 원칙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사행을 따라 열하로 가는 길에 중국인들의 정비된 생활과 일솜씨를 보고 경탄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위에 차려놓은 범절을 보면 어디 한구석이라도 빈틈이 없이 모두가 방정하고 물건 하나라도 허투루 굴려놓은 것이 없었다. 비록 소외양간, 돼지우리까지라도 되는 대로가 아니라 일정한 제도가 있으며 심지어 거름더미, 똥구덩이까지도 그림같이 정갈했다. 옳거니! 이렇게 된 후에라야 이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용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이 있을 것이며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덕(德)을 정(正)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모르면 그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생활이 스스로 넉넉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그 질서와 도덕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 연암이 강조하는 이용후생이란 완전히 백성들의 물질 생산과 경제 생활의 제고와 향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또, 이용(利用), 후생(厚生)과 정덕(正德)은 순차적인 인과관계로서 이용이 없으면 후생이 있을 수 없고, 후생이 없으면 정덕, 즉 사회적 질서와 도덕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암은 또 〈홍범우익서〉에서 진일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용이 있은 후에 가히 사람들의 생활을 풍족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생활이 유족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이제 저 물을 시기를 따라 가두고 터놓고 함으로써 한재를 만났을 때 수차로 물을 끌어올려 논밭에 대고 또 갑문을 이용하여 배를 통하게 하면 물은이루 다 주체해서 쓰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물을 번히 놔두고도 이용하지 않으니 그건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이제 저 불도 시기를 따라 성질이 다르고 강하고 약한데 따라 소용이 다르니 그릇을 굽거나 쇠를 녹이고 농기구를 만드는데 각기 적당히 맞추어 쓴다면 불은 이루 다 주체해 쓰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불을 번히 놔두고도 이용하지 않으니 그건 불이 없는 것과 같다. … 저 우뚝 높이 솟아있는 산들을 사방으로 재면 평지보다 몇배되는 면적이 나오는데 군데군데서 금, 은, 동, 철이 나온다. 만약 채광의 법도를 알고 금속 제련의 기술을 익힌다면 천하의 어느나라보다도 부유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집을 짓고 관곽을 짜고 수레를 만들고 농기구를 제작하는 등 그 용처에 다라 같지 않은재목들을 때에 따라 잘 조절하고 잘 가꾸어만 가면 국내에서 넉넉히 쓸 수 있을 것이다. 아하! 땅에 따라 토질이 틀리고 곡식에 따라 성질이 같지 않건만 농사에 관한 지혜를 농군들에게만 맡기어두고 땅에서 소출을 바라고 있구나! 어떻게 이용해야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백성들이 굶주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여기에서 나라의 수리, 화력자원의 합리한 이용과 채광업 임업을 발전시킬데관한 사상 그리고 제조수공업과 영농법의 과학적 운용에 관한 개혁사상들이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나라자원의 합리하고 적극적인 개발과 이용이 없이는 나라살림 백성들 생활이 넉넉해질 수 없고 나라살림 백성들 생활의 향상이 없이는 사회적 질서나 정신 도덕의 바름을 기대할 수없다는 것이다. 이용후생에 관한 연암의 이러한 사상은 유물론적인것으로서 완전히 정확하며 부례(復禮)와 봉건적 교화로써 기존 질서유지에만 몰두하고 있던 통치계급이나 사대부들의 고루한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2) 북학사상(北學思想)
연암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목적으로부터 출발하여 북학중국(北學中國)의 사상을 제기하였다. 이는 그의 이용후생의 사상과 밀접히 연관되는 것으로서 그의 방대한 여행기이며 실학전서인 《열하일기》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사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17세기 이래로 이씨왕조의 집권층과 봉건적 사대부들은 존명배청(尊明排淸)의식의 영향하에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춘추의리(春秋義理)를 고취하였다. 그들은 여진족이 지배하는 청나라를 오랑캐의나라로 멸시하고 맹자의 대도를 유지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으며 중국문화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처하면서 호복(胡服)에 머리 깎은 오랑캐들한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양하였다. 그 실질에 있어서 이것은 국내의 복잡한 모순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서방 사상의 전파를 막으며 자기들이 실시하는 폐쇄정책과 우민정책을 합리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하건만 청나라는 자기 나름대로 서방 과학 기술문명의 전래를 묵인하고 국내 각 민족의 다원적 문화를 융합하면서사상, 학술, 정치, 경제, 과학기술 부문에서 거대한 발전을 가져와 세계 최강을 자랑할 정도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지리상으로보나 국익으로 보나 이조 지배계급들의 존명배청정책과 대의명분사상은 자기를 피동적, 고립적 위치에 얽어놓는 극단적으로 허무맹랑하고 착오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당시 나라와 민족이 사상적 낙후와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고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는 길에서의 일대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하를 도모하는 사람이면 참으로 인민에게 괴롭고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그 법이 혹은오랑캐한테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취하여 본받아야 한다"고 설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연암은 머나먼 여행 도중에서 크게는 중국의 정치경제제도, 외교정책, 작게는 벽돌, 기와 조각, 거름더미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듣고 보고 적고 하면서 하나라도 더 많이 더 잘 배우고 파악하려 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북학중국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방법이었으며 진짜 목적은 이이지법(以夷之法), 양아지허(養我之虛)하자는 데 있었고, 부국유민(富國裕民)의 실현에 있었다.
3) 상업경제의 발전
연암은 또 상업경제의 발전, 수륙교통의 정비와 문호개방을 적극 주장하였다. 연암은 재부의 축적과 국계민생(國計民生)에서 상업이 차지하는 역할을 그누구보다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의 발전을 적극적으로창조하였다. 그는 각 지방의 특산물과 각지 백성들의 생활필수품들이 모두 장사를 통해 매매교환이 이룩되어야 하고 재부의 축적과 생활의 향상은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전국적인 유무통상(有無通商)의 발전을 적극 주장하였다.
중국에서는 물산이 한쪽에 몰려 있지는 않고 쉴새없이 흘러 퍼지고 장사를 통하여 이곳 저곳에 옮겨지니 재화가 풍성하다. … 이제 보아 육진지방의 마포와 관서지방의 명주와 삼남지방의 딱종이와 해서지방의 솜, 철과 내포의 생선과 소금이 죄다 백성들의 사람에 없어서는 안될 물건들이요 청산, 보은지방의 무진장한 대추나무숲과 황주봉산지방의 무진장한 배나무와 홍양, 남해지방의 무진장한 귤나무, 임천, 한산지방의 천만 이랑되는 모시밭, 관동지방의 수없는 벌통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자원으로서서로 유무통상을 하고자 함이야 누가 싫다할 것인가?
연암은 또 국내자원의 개발과 상업유통에 있어서 수륙교통의발전이 필수적임을 강력하게 지적하였다.
영남지방 아이들이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지방사람들은 주두나무열매를 담가 간장을 대신하고 서북사람들은 감과 귤을 분간 못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멸치를 거름삼아 쓰되 어쩌다가 이것이 서울까지만 오면 한웅큼에 한닢 갚이니 얼마나 이것이 귀한 물건인가! … 이 지방에는 흔한 것이저 지방에는 귀하고 이름만 들었을 뿐 물건을 볼 수 없는 까닭은 대체 무엇때문일까? 이는 곧 가져올 힘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도 넓이가 수천리나 되는 나라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이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글이 《주례(周禮)》와 같은 성인의 저술이니 … 어허! 한심하고도 기막힐 일이로다!
국계민생은 상업의 발전에 달려있고, 상업의 발전은 편리한 수륙교통을 요구한다. 각 지방의 특산자원들은 제자리에서 썩어나고 있건만 전국의 백성들은 물질 난에쩔쩔 매고 있다. 귀중한 특산들이 유통되어 돈으로 되지 못하고 난 자리에서 거름으로 변해버리며 백성들은 가난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것은 누구의 죄인가? 이것은 선비와 집권자들이 유교경전에 매달려공리공담(公理空談)만 일삼고 실용지학(實用之學),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하지 않은 죄이다. 결국, 연암의 이러한 사상은 현행의 봉건적 정책과 부패무능한 사상의식기풍을 부정 비판한 기초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측면 지향에서 제기되고 있다.
4) 토지문제와 농민문제
《한민명전의》에서 연암은 국법으로써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땅을 천하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려 나라 재정의 궁핌을 미봉하고 아사의 변두리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을 구출할 것을 제기하였다.
한전(限田)을 실시한 다음에 겸병자가 없어질 것이고 겸병자가 없어진 다음에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이고 산업이 균등해진 다음에 백성들이 토착(土着)하여 각각 자기의 땅을 경작하게 될 것이고 근면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구별이 드러나게 된 다음에 농업을 권할 수 있고,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전(限田)의 의의는 산업의 발전과 생활의 안정, 농업의 권장과 함께 올바르게 제기되고 있다. 연암은 또 농업과학저서인 《과농소초》에서 생활과 농업에 관한 정론을 펼치면서 무위무책한 사대부들에 대한 논고(論告)를 진행하고 외국의 과학적 영농법을 어떻게 국내에 적용하여 농업의 발전을 촉진할 것인가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이 저술에서 연암은 농기(農期)의 적시적 활용, 농업 기후의 관측, 전답의 구획과 농기구의 개량, 밭고랑 짓는 새로운 방법, 거름내는 방법, 수리 시설의 정비와 수차의 이용, 저수지의 구축, 종자의 선택과 처리, 병충해 방지, 목축 등 농업의 제반 분야에 걸쳐 그 과학적 방법을 소개, 논술하고 있다. 그는 특히 영농법의 보급과 함게 선비들이 농업의 과학적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5) 인간 평등
연암은 기존 봉건통치질서의 기반으로 되고 있는 신분적 등급제도를 반대하고 인간적 지위의 평등을 주장하여 나섰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것이다. 만일 귀천을 논할진대 나라의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야만 고귀한 존재로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말하는 쓸모 있다는 사람이란 기필코 무용한 사람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무용한 사람이란 반드시 유용한 사람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이것은 당시 무위도식하는 그러한 상류계층 인간들을 무용한 인간으로 일신에 재덕을 겸비하고 있으나 낮은 신분 때문에 억눌려 살고 두 손으로사회물질재부를 창조하나 천민이라고 하여 기시받는 근로 백성을 유용한 사람들로 보는 것으로서 재래의 낡은 귀천관(貴賤觀)에 대한 반발이다. 그는 또 선비는 사민의 하나로 농, 공, 상과 평등해야 하고 王公貴族들과도 인간적 지위는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선비는 아래로 농민, 장인바치들과 나란히 하며 위로 왕공들과 벗하여 그 지위에 있어서 하등의 차이도 없다." 이러한 신분적, 인간적 평등관으로부터 출발하여 연암은 서자들의 사회적 출로를 어금하는 당시의 신분차별적 악법을 준열히 규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연암은 또 사회적 인간관계와 횡적래왕(橫的來往)에 있어서 빈부귀천을 따질것이 아니라 오직 인격의 높고 낮음을 분간해 처사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자기의 교우관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벗이란 것은 서로 인격을 벗하는 것이니 나이를 따지지 말아야 하고 지위를 가리지 말아야 하며 형제, 친척의 세력을 논하지 말고 벗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귀하고 천한 것은 비록 달라도 인격만 있으면 스승으로 섬길것이요, 나이는 근사치 않아도 교양의 도움으로 될 것 같으면 벗으로 사귈 것이다.
여기에서 귀천을 따져 교우하는 고루한 명분사상과 세력을 논하여 교제하는 신분적 등급차별의식이 철저히 일소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인간 평등관의 소유자였기에 연암은 일생에 아무런 틀거지도 없이 처세하고 교우할 수 있었다. 그의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이며 친우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들은 모두서얼출신들이었고, 외장사, 나무꾼, 하인, 이웃집 상인배들도 무시로 그의 말동무로 되곤 하였다. 그는 자기의 인간관계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다.
일을 만나서 잘 일깨워준다면 비록 돼지 치는 상사람이라도 나의 좋은 벗이고 의로운 것을 보고충고하여 준다면 나무하는 초동이라도 나의 훌륭한 벗이니 이로써 생각한다면 나는 과연 세상에 벗이 적지 않다.
양반계급의 일원으로서 신분적 등급 차별이 엄연히 지켜지고 있던 당시에 연암의 이러한 인간평등의 사상의식은 그저 범상한 것이 아니다.
6) 교육 내용의 개혁
연암은 교육의 권장과 교육내용의 개혁을 창도하였다. 물론, 역대로 내려오면서학교교육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는 재래로 태학(太學), 국학(國學), 향교(鄕校) 등 유교교육기관이 있어 양반집 자식들한테 유교지식을 전수시켰는데 교육의 주요 내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육예(六藝)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연암이 일으키고자 하는 학교는 이런식의 학교가 아니었다. 그는 지방행정에서 제일 급히 해야할 일은 농상(農桑), 부역(賦役), 인구(人口) 등 세가지이고 그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학교교육이라고 인정하였다. 그것은 교육은 부국유민(富國裕民)과 만사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학교에선 양반 자식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자식들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학교에서 옛글귀나 외우고 육예(六藝) 따위나 고답하는 것을 반대하고 교육내용의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유교경전만 교조적으로 전수할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 현실생활에서 필수 되는 지식, 사회적 실리, 실용에 유관 되는 산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의 우수한 젊은이들을 뽑아서 크고 작은 마을의 크고 작은 학교들에 받아들여서 이끌고 가르쳐야 한다. 백성을 지도하고 추동하는 방법으로서 이보다나은 것이 없다. 솔선수범으로 이끈다면 백성들이좋아 따르기를 바람에 풀 쓸리듯하고 비온 뒤에 새움이 돋듯할 것이다. … 학교를 운운하는 자들이 공연히 빈말로 시서의 옛문구나 지껄이고 육예의 항목이나 세면서 일상적으로 눈, 귀, 손, 발로 늘 접촉하고 … 오늘날의 소위 점잖은 사람들도 애초부터 새까맣게 모르고 있는 판이다.
2. 연암의 철학사상(哲學思想)
연암 박지원의 철학사상은 자연 내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 과학적 인식을 그는 우선 일장의 천체론으로 확인하고 있는데, 요컨대 지전설이 그 골자다. 김석문의 이른바 "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 지구, 해, 달이 구체로서 허공에 떠있다는 이론)"에서 발전한 홍대용의 창견으로 알려진 지전설을 수용한 것인데 연암이 이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시 그의사상의 일부로 거론할 수 있는 근거를 얻는다. 이 지전절의 내용은, 지구가 일전하면 일일(一日)이 되고, 달이 지구를 한바퀴 돌면 일삭(一朔)이 되고, 해가 지구를 한바퀴 돌면 일세(一歲)가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전설은 물론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는 아직 거리가 있는 터이지만, 유교의 전통적인 우주상인 "천원지방 천동지정(天圓地方 天動地靜)"이라는 인식을 반대하고 나온 점에서 당시로서는하나의 혁명적인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당시의 자연과학이 도달한 수준에 서서 물질 세계의 본질과 사물현상을 소박하나마 비교적 올바르게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연암은 위의 지전설과 함께 우주만유는 둥글다고 전제하고, '원자필전(圓者必轉)"이란 명제를 세워, 지구가 부패하지 않는 것은 움직이기 때문이란 예를 들어 모든 것은 움직이는데서 생명을 가지고 정지하는 데서 사멸한다는 생각을 시사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연암은 만유를 동태로 파악하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자연관으로부터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은 물론이고 우주 세계 무한성 이론도 제기하였다.
별은 해보다 크고 해는 지구보다 크고 지구는 달보다는 크다는 것이 정말 그렇습니다. … 저 하늘에 가득찬 별들로부터 이 세 개 둥근 방울을 본다면 대공에 점처럼 벌려있는 것이 아주 하찮은 작은 별로밖에 안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람들이란 한 덩어리물과 흙짬에 앉아서 안계가 넓지 못하고 상상력도 한정이 있고 보니 또 다시 허투루 뭇별 들을 가지고 9주로 쪼개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 보아 우리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9주란 것은 얼굴에 찍힌 검은 사마귀 한 개와 다를 것이 어데 있겠습니까? 소위 '큰 못에 뚫린 작은 구멍'입니다.
다음으로 연암의 우주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오행설(五行說)"에 대한 그의 신해석이다. 그의 이신해석은 종래의 상생론 (相生論 :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이라는, 단순한 다섯가지 무기물질(無機物質)에 부여한 자모적 관념(子母的 觀念)에 대한 부정과 형이상학적인 사변적 인식에 대한 부정의 두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전자에서는 그의 합리적, 개체주의적 사고형태를, 후자에서는 그의 실용주의적 사고형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연암은 우선 세계는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물질은 자연만물형성의 기본 질적요소라고 인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이러할 뿐만 아니라 다른 별세계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월구(月球)를 실례로 들면서 "어찌 달세계라고 하여 기운이 모여 꿈틀거리는 생물로 화한 것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사는 띠끌 세상을 미루어 저 달세계를 한번 생각해본다면 저 달 속에도 응당 역시물질이 있어 쌓이고 모이고 엉킨 것이 오늘 이 대지가 한점 작은 '먼지'의 집적인 것과 같은 것이다. '먼지'와 '먼지'는 서로 의지를 삼아 '먼지'가 엉키면 흙이 되고 '먼지'가 거친 것은 모래가 되고 '먼지'가 단단한 것은 돌이 되고 '먼지'의 진액은 물이 되고 '먼지'가 더우면불이되고 '먼지'가 엉켜 맺혀서는 쇠가 되고 '먼지'가 자라면 나무가 되고 '먼지'가 움직이면 바람이 되고 '먼지'가 더위에 뜨고 기운이 북받치면 여러 가지 벌레로 화하는 바 오늘 우리 사람이란 즉 이 여러 가지 벌레의 한 종족일 것이다.
이렇듯 미세한 먼지는 물질의 기본원소이고 또 물질은 자연만물의 형질의 근본적 요소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무기체로부터 유기체에로 발생, 발전한데 관한 소박한 진화론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물질 일원관으로부터 출발하여 연암은 당시 성행하고 있던 주자 성리학자들의 "기(氣)는 리(理) 가운데 있다."라는 객관유심론을 부정하면서 자기의 유물론적 이기관을 내세웠다.
만물이 생겨나는데는 무엇이나 氣(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있는 것은 氣(기)이며 이것이 차는 까닭은 理(리)이다. 음과 양이 서로 부딪힐 때 그 가운데 이가 있다. 기가 이것을 싸는 것이 마치 목숭아가 씨를 품는 것과 같다.
또 연암은 물질은 영존한다는 물부멸론(物不滅論)을 주장하였는데, "무릇 물이 형체를 이룸에는 반드시 그 질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며 추상적인 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물(物)을 들어 그질의 영존성을 논증하고 있다.따라서 그의 관점은 오늘날 물리학에 접근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연암의 철학 사상에서, 그 과학적 인식의 측면은 연암 자신이 전문적인 물리학자도 아니었고, 또 역사적 제약도 있었던 만큼 인식의 내용 그 자체에 있어서는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직 소박한 단계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식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의형태 또는 방향에 있다. 결국, 우주에 대한 자연과학적, 곧 형이하학적이요 가치중립적인 그의접근 태도는 주자학의 형이상학적이요 도덕적 목적론의 입장에 선우주관과 대결되고, 그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의 탈피는 역시 주자학의 중국 중심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그의 세계관의 개방성 또한 종래의 폐쇄성과는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3. 연암의 문학사상(文學思想)
1) 실학으로서의 문학
연암 박지원은 〈답창애〉라는 글을 통해 훌륭한 글은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글이라 하여 실용과 실질을 강조함으로써 문학의 기본정신을 실학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문장에는 도가 있으니, 소송하는 자가 증거를 제시하듯 해야 하고, 행상이 자기 상품의 이름을 외치듯 해야 한다. 비록 사리가 분명하고 정직하다고 해도 다른 증거가 없으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글을 쓰는 자가 이것 저것 경전의 글을 인용해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한다. …관호와 지명은 서로 차용할 것이 못된다.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쳐댄다면, 비록 하루 종일돌아다녀도 나무 한 단을 팔지 못할 것이다. 만일 제왕이 사는 곳을 모두 장안이라 하고, 역대의 三公을 모두 승상이라 부른다면 명분과 실질이 혼란하게 되어 도리어 비속하고 더러워진다.
여기서 글이 소송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은 곧 글이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박지원이 글을 구태어 소송에다 비유했던 것은 그만큼 문학을 철저하게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인식한 결과라 생각한다. 또한 글이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리가 분명하고 정직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지적한 引據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지만, 그렇더라도 현실과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관호나 지명을 차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현실과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관호나 지명을 차용한다는 것은 마치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쳐대는 것과 같고, 또 제왕이 사는 곳을 모두 장안이라 하고, 역대의 삼공을 모두 승상이라 부르는 것과 같아서 그목적 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이라면 반드시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있는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박지원은 창작의 실제적인 문제를 군사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면 병사를 알 것이다. 글자는 비유하자면 사졸이고, 뜻은 비유하자면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는 전장이며 성루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 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행진과 같으며, 운으로 소리를 내고 수식으로 빛을 내는 것은금고정기와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대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기이다. 억양 반복은 오전 시살하는 방법이고, 파제하여 결속하는 것은 성에 먼저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수단이다. 함축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노인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다. 여음이 있는 것은 군대를 거느리고 개선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박지원이 구체적으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필이면 군사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앞서 소송과 마찬가지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는 글이라는 문학의 실용적, 실리적 측면을 그만큼 심각하게 의식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실용적, 실리적 측면을 중심으로 현실과 사실을 무엇보다도 강조한 박지원의 문학사상은 기본적으로 실사구시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2) 사실주의
연암은 〈공작관문고자서〉에서, 글이란 것은 생각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나타내면 되는 것일 뿐 공연히근거없는 말로 글을 억지로 꾸미는 것과 같은 다른 그 무엇이 개재해서는 참다운 문학을 이룰 수 없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글이란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면 그만일 뿐이다. 저 사람들이 제에 임해서 붓을 잡고는 문득 옛 사람이 쓴 어구를 생각하고, 경전의 뜻을 애써 찾아내어 생각을 근엄하게 꾸미고 글자마다 장중하게 하는 것은 비유하면 화공을 불러 초상화를 그릴 때 용모를고쳐 그 앞에 서는 것과 같다. 눈은 뜨고 있으나 눈동자는 구르지 않고 옷은주름도 잡히지 않아 그 평상시의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으니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 한들 그 본래의 모습을 그려낼 수는 없는 것이다. 글을 짓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서 연암은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대상의 실체, 즉 거짓 되지 않은 참모습을 표현해 내는 데 있음을 말하고 있다. 글의 제목을 놓고 고문의 어구나 경전의 뜻을 찾아 문장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은 실제의 용모와 다른 모습을 하고 화공앞에 서는 것과 같아 쓰고자 하는 진실을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사실주의 정신과도 그 맥이 통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자신이 쓰고자 하는 내용이 비속하고, 또 글을 표현해 내기 위해서는 자질구레하고 비속한 어구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진실한 글이 이루어진다고 초나라 사서인 《 》과, 司馬遷과 班固가 극악무도한 도적의 일을 서술한 예를 들어 입증하고 있다.
문학론에서의 그의 주장의 중추적인 근간은 한 마디로 말해 역사적인 현장성의 존중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적으로 다음 일단의 논설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옛것을 모방해서 글을 짓기를 마치 거울에 물건을 비치듯 하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좌우가 서로 반대가 되니 어찌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이 물체를 비추듯이 하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하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한낮에는 난쟁이, 땅딸보가 되었다가 해가 기울 무렵에는 키다리, 꺽다리가 되니 어찌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림으로 물건의 형상을 묘사하듯이 하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걸어 다니는 자가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자는 소리가 없으니 어찌 같다고 할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끝내 같아질 수는 없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같음을 추구하는가? 같음을 구해 보았자 참이 아니다. 세상에는 서로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아주 닮았다'라고 하고, 서로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참모습에 아주 가깝다'라고 한다. 이렇게 혹초니 핍진이라 말하는 그 가운데 이미 가와 이가 개재해 있는 것이다. … 이씨자 락서는 올해 나이16세로서 내게 다니며 공부한 지가 해포가 넘는다. 그는 심령이 일찍 열렸고 혜식이 구슬같다. 한 번은 그의 록천관집 문고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가 글을 짓기 시작한 지가 이제겨우 두어해 밖에 안 되었습니다만 남의 노여움을 산 일은 많습니다. 한마디만 조금 새롭고, 한 글자만 특이한 것이 있으면 문득 '옛날에도 이렇게 쓴예가 있느냐'고 따집니다. 없다고 대답하면 버럭 성을 내면서 '어떻게 감히 이렇게 쓰느냐'고들 합니다. 옛날에 이미 그렇게 쓴예가 있다고 하면 제가 뭣 때문에 다시 그렇게 되풀이하겠습니까. 원컨대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에 귀결을 정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내가 이마에 손을 모아얹고 삼배를 한 다음에 꿇어 앉아 말했다. "그 말이 심히 옳은 말일세. 끊어졌던 학문을 가히 흥기시킬 만하네. … 그래도 자꾸 따지고 들고 노여움을 여전히 풀지 않거든 조심스럽게 이렇게 대답하게. "서경의 글들도 삼대적의 시속 글이요, 이사와 왕희지의 글씨도 주, 진 때의 시속글씨입니다."
여기에서 명백히 파악할 수 있듯이, 그는 당시까지도 문단의 지배적인 추세였던, 고전, 그것도 중국의 그것을 모델로 하고, 그 권위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바로 자신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신의 시대에 충실하려는 위치에서 문학적 지평을 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인 현장성의 존중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는 문학의 공간적인 장으로서도 바로 자신이 소속해 있는 민족과 사회 그 현장에 충실한 것을 주장했다.
3) 독창성
연암은 그의 문학론을 통하여 도처에서 작품에서의 독창성을 강조하고있다.
문장은 어떻게 지을 것인가? 논자는 반드시 法古를 하여야 된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세상에는 의모와 방상을 하고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 법고를 어찌 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新은 가한가? 이리하여 세상에는 마침내 괴탄하고 음벽한 글을 쓰면서도 두려운 줄을 모르는 자가 있게 된 것이다. … 창신을 어찌 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체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위의 글, 〈초정집서〉에서 분별없이 이루어지는 法古와 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모방을 일삼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들과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하면서 근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자들을 함께 비판한 것으로 법고하는 자는 옛것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하는 자는 不經한 것이 병통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 해결 방안을 연암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옛것을 본받는 사람들은 옛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함이 근심되고, 새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 불경됨을 근심한다. 진실로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할 줄을 알고, 새 것을 창안해 낼지라도 능히 전아할 수있다면, 今文이 古文과 같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고, 창신의 조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법고, 창신의 이론은 전통과 변혁의 조화를 통하여 보다 나은 창작의 세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근본적 원리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변천하는 시대감을 흡수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구현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4) 풍자성
연암은 문학이야말로 현실에서 뜻을 펴지 못한 위치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요, 또 이를 통하여서만이 사회를 의도적으로개선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연암은 차츰 현실과 멀어져 가는 자기 시대의 문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개선되어가야 하는가를 사상과 문체의 개선을 통하여 실현하려 하였다.
나와 같은 사람은 중년 이래로 落拓해 쓰러져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以文爲戱하였다. 때로 궁한 슬픔과 무료함이 일어나면 雜駁하고 無實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자신을 배우와 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고 만들었으니 참으로 천하고 비루한 짓이다. 성품이 나태하고 산만하여 벌레를 새기고, 갈대를 그리는 사소한 기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남을 모두 그릇되게 했다.
이것은 정조가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고 근래에 문풍이 타락한 것이 연암의 죄라고 하면서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쳐 속죄하도록 하라는 말을 전하자, 연암이 자신의 문학하는 자세를 말한 것으로, 자신의 반성이면서, 한편으로는 힘의 시대에 도전하는 연암의 반주자적 풍자성의 과시라고도 할 수 있다. 글로써 놀이를 일삼는다는 표현은 落拓하여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사회를 비웃고 풍자하는, 사회를 향한 일종의 매서운 비판정신이다. 벌레를 새기고 갈대를 그린다는 사소한 기술은 곧 현실의 사실적 표현이면서 자신의 행위를 비하하여 표현한 것은 자기의 문학을 옹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으로 일종의 반어적 기술로 볼 수 있다.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