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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반남박씨의 고찰

  반남박씨의 발자취 호장공을 선조로 모시는 이유 반남의 인물사 문중 항열에 대한 고찰
족보 발행에 대한 고찰 가구 및 인구 집성촌 반남지방의 역사적 고찰묘정.서원.사당.정문
시호가 내려진 어른 윗대 어른의 호칭 야천과 5응 17동 지정 문화재
 
 


[야천과 5응 17동]
"야천" !!! 조선시대 한양의 명문 후손들 사이에는 "야천"이라는 낱말을 혀로 입안에 딱딱 두드리면 사람들 두뇌의 어느 가문에 어떤 사람들의 형상이 즉시 떠오른다.이는 가문의 홍복(洪福)이었다.
야천(문강공) 박소 가문은 중흥의 조(祖)가 멋지다. 명문의 탄생은 박소(문강공 야천)의 첫걸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중흥의 조(祖)의 첫걸음이 우렁차면 가문의 앞길이 활짝 트인다. 그 걸음이 의로우면 아들과 손자가 감동을 하여 복을 받는 바탕이 된다.
야천 선생은 인생의 출발이 우렁차고 의로웠다. 1493년에 태어나.어린 나이로 김굉필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때가 무오사화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을 때였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또한 학문에 힘써 식견이 더욱 넓어졌으므로,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 향공3과에 모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고,1519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강석(講席)에 나아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하여 모두 옥당정자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라.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사인. 시강원필선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 나주의 반계서원에 제향 되고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야천(冶川) 선생은 아들 5 명과 손자 17 명을 두셨다. 아들의 돌림자는 "응(應)"자이고, 손자의 돌림자는 "동(東)"자이다. 이로 인해 야천 집안을 『 5應 17東 』이라고 부른다.
다섯 아들 중 맏아들 박응천은 학행이 뛰어나 왕자사부가 되었고, 의적 임꺽정도 두려워할 만큼 근신하고 청렴했다. 둘째 박응순은 딸이 선조의 비가 되어 반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왕비의 아버지인 줄 세상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처신이 겸허했다. 왕비의 아버지가 인품이 훌륭하고 왕비의 할아버지가 의로우니 왕비의 숙부들이 판서나 상신의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아니한 듯하다. 셋째 박응남은 문과 하여 호당에 들고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6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넷째 박응복은 문과 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17명의 손자 중에 5명이 문과 하여 3명이 당상관 이하의 벼슬을 했고 2명이 판서를 지냈다. 이만하면 야천 가문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으니 이것을 두고 화려한 창업이라 하지 않겠는가?
야천은 벼슬이 당상관도 못 되었지만 학덕으로 빛나는 명성이 경상의 반열에 있는 이에 못지 않았다. 이것은 문묘에 배향된 좌의정 박세채 고조부다운 가문의 영광이다.

야천 가문에서 조선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며 빤짝이는 별들이 무수히 나왔는데, 그 중에서 학문으로 빛을 낸 석학 7개 별을 뽑는다면, 석학, 제1호 별은 박동량, 제2호 별은 박태보, 제3호 별은 박필주, 제4호 별은 박윤원, 제5호 별은 박지원, 제6호 별은 박준원, 제7호 별은 박성양이라 할 수 있다.
야천 박소 가문은 왕비 1명, 부마 4명을 배출했다. 이것은 역시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행운이다. 반박의 보석을 값지게 한 것은 가문에서 배출한 왕비와 이 가문에 시집온 공주[옹주]들이다. 왕비는 야천 박소의 둘째 아들 박응순의 딸이며,부마는 박미, 박필성, 박명원, 박영효이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는 것도 큰 복이다. 야천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학덕으로 나라와 이웃을 사랑한 야천의 가르침을 받고 보며 들은 자손들이 받은 복은 『 다이아 서 말이 넘는다.』
야천선생이 현조이었기 때문에 가문이 일원체제를 고수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야천 가문은 한 할아버지로 단결하는 힘이 강해졌다. 야천이 바로 이 가문의 구심점이 되었다. 야천 가문의 후손들은 야천을 이탈할 수 없다. 자연히 야천이라는 깃발 아래로 집결하기 마련이고, 이로인해 야천 후손들은 단결력이 점점 강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후손의 힘이 되며 후손으로 받는 복이 된다.

야천의 아들 (5응) 과 손자 (17동)

 휘

 호칭

 년대

 관직

묘소

1應 응천(應川)

감정(監正)공

1516 - 1581

왕자사부.한성부서윤.사재감정

 경남 합천

동현(東賢)

활당(活塘)공

1544 - 1594

이조정랑. 호:활당(活塘)

 경남 합천

 동호(東豪)

가선(嘉善)공

1549 -   ?   

참봉.가선대부(嘉善大夫.贈)

 경기 양주

동노(東老)

정자(正字)공

1551 - 1577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경기 양주

동준(東俊)

도사(都事)공

1553 - 1596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

 경기 포천

동민(東民)

참봉(參奉)공

1556 - 1593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

 충남 논산

동선(東善)

서포(西浦)공

1562 - 1640

의정부 좌참찬.호:서포(西浦)

 경기 김포

2應 응순(應順)

 부원(府院)공

 1526 - 1580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경기 양주

동언(東彦)

 시정(寺正)공

 1553 - 1605

호조좌랑.통훈사복시정

 경기 양주

              女 조선 14대 선조비 의인왕후(懿仁王后) 

 

3應 응남(應男)

 남일(南逸)공

 1527 - 1572

호조참판,도승지. 호:남일

 경기 의왕

동도(東燾)

 온양(溫陽)공

 1550 - 1614

온양군수(溫陽郡守)

 충북 제천

동휴(東烋)

 

 

 

 경기 의왕

동점(東點)

 토산(兎山)공

 1567 - 1659

 토산현감(兎山縣監)

 경기 의왕

4應 응복(應福)

 졸헌(拙軒)공

 1530 - 1598

호조참판,병조참판 호:졸헌

 경기 파주

동윤(東尹)

 부솔(副率)공

 1561 - 1593

익위사부솔(翊衛司 副率)

 전남 영암

동렬(東說)

 남곽(南郭)공

 1564 - 1622

형조참의. 호:남곽(南郭)

 전남 영암

동망(東望)

 길주(吉州)공

 1566 - 1615

길주목사(吉州牧使)

 강원 철원

동량(東亮)

 오창(梧窓)공

 1569 - 1635

형조판서. 호: 오창(梧窓)

 경기 시흥

5應 응인(應寅)

 도정(都正)공

 1532 - 1606

돈영부도정 (出:緝)

 경기 김포

 동기(東紀)

 사마(司馬)공

1557 - ?   

사마(司馬)

 경기 김포

동적(東績)

 

 

 

 

동위(東緯)

 호군(護軍)공

 1576 - 1657

절충호군(折衝護軍)

 경기 김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