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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박씨 10 왕 ]
■ 신라시조왕(新羅始祖王)
휘(諱)는 혁거세(赫居世)이신데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 이다. 또 휘를 향언왕(鄕言王)이라고도 한다. 서기전 69년에 탄생하시고 서기 4년에 돌아가셨다.
배위는 왕비 알영부인(閼英夫人) 이시고 현재의 능은 경주 시 탑동(塔洞)에 소재한 5능(陵)이다. 이곳은 시조왕, 시조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능이 함께 있어 소위 "5능" 이라 부른다.
신라 시조 왕이시며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휘(諱)를 향언왕(鄕言王)이라고도 한다. 서기전(BC) 69년에 탄생하여 서기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6촌장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어 왕위에 올라 국호를 서라 벌(徐羅伐)이라 정하고 나라를 다스렸는데 재위 일자는 전 한(前漢)의 선제(宣帝) 오봉 원년(五鳳, 元年)으로 갑자(甲 子)년이요 4월 병진(丙辰)일이었으며 시조 왕은 서기 후 4 년(甲子년) 3월에 73세로 돌아 가셨다.
시조 왕이 탄생하실 무렵인 서기전(BC) 69년(壬子)7월에 시 조 왕의 성모(聖母)가 선도산(仙挑山-신선세계)에서 양산 (陽山)의 나정에 내려와 시조 왕을 탄강 하실 때 신이 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고허촌장 소벌공(高墟村長 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있었다. 이상 히 여겨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것이 있어 이를 갈라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성숙하였다.
6촌 사람들은 아이의 출생이 신이 함으로 우러러 받들었는 데 13세가 되자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 성을 박(朴)으로 삼고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의 말로 왕이란 뜻이다. 한편 재위 5년째인 무진(戊辰) 기원전 53년 1월에 알영씨 (閼英氏)를 왕비로 삼았다.
어느 날 용이 알영정(閼英井-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 에서 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이를 본 노파가 이상이 여겨 기르며 우물이름을 따라 "알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알영 씨는 자랄수록 덕용(德容)이 뛰어났다. 시조 왕이 이 말을 듣고 알영씨를 왕비로 삼으신 것이다.
시조 왕은 왕비 알영부인(閼英夫人)과 전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잠(農蠶)을 권하는 등 생산증가에 힘써 백성 들이 두 분을 이성(二聖)이라고 칭송하였다.
■ 남해왕 (南解王, ? ~ 24)
신라의 제2대 왕(재위 4∼24). 성 박씨. 휘(諱)는 민해(愍解) 또는 희해(熙解)이시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맏아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 왕비는 운제부인(雲梯夫人). 신라가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쓰기 전에는 차차웅(次次雄). 거서간(居西干) 또는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남해차차웅 또는 남해거서간이라고도 한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왕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후하며 지략이 뛰어났다. 6년에 시조(始祖)의 능을 조영하였다. 8년에 석탈해(昔脫解)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사위로
삼았으며, 10년에 그를 대보(大輔)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 유리왕 (儒理王, ? ~ 57)
신라 제3대 왕(재위 24∼57). 성 박(朴). 휘(諱)는 치리(治理) 이시다.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왕비 김씨로 명선왕후(明宣王后)이다. 시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운제부인(雲帝夫人)의 태자(太子). 남해차차웅이 죽자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유언으로 석탈해(昔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여동생 아효부인(阿孝夫人)이 탈해에게 시집감으로서 탈해는 유리왕의 부왕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었다.
28년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며, 32년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姓)을 내렸다.
또한 관계(官階)를 17등으로 제정하는 등 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 낙랑(樂浪)이 고구려에 망하여 유민(流民)들이 넘어오자,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배치하여 살게 하였다. 6부의 여자들에게 가배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다. 유언으로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사릉(蛇陵)에 묻혔다.
■ 파사왕 (婆娑王, ? ~ 112)
신라의 제5대 왕(재위 80∼112). 원래의 칭호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다. 성(姓)은 박씨(朴氏)로 휘(諱)는 검(檢)이시다.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 또는 유리왕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와 석씨며 김씨는 사성왕후(史省王后)인데 갈문왕(葛文王) 허루(許屢)의 딸이다. 80년 9월 제4대 탈해왕(脫解王)이 죽자, 유리왕의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으나 현명하지 못하여 신하들이 파사왕을 옹립하였다.
94년 가야(伽倻)가 마두성을 포위 공략하자 이를 물리쳤고, 101년에는 금성(金城)의 남동쪽에 월성(月城)을 새로이 쌓고 이거(移居)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 실직국(悉直國). 압독국(押督國) 등 세 나라를 합병하여 국세를 넓힌 데 이어 다시 108년 가야를 공격,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등을 합병하는 등 현군으로서 추앙을 받았다. 능은 사릉(蛇陵:경주 5릉)이다.
■ 지마왕 (祗摩王, ?~134)
신라 제6대 왕(재위 112∼134). 성 박씨(朴氏). 파사왕(婆娑王)의 장남. 지미왕(祗味王)이라고도 하는데, 원래의 칭호는 지마 이사금(尼師今)이었다.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金氏). 비(妃)는 김마제(金摩帝)의 딸 애례왕후(愛禮王后)인데 갈문왕 마제(摩帝)의 따님이다. 115년 가야(伽倻)가 침범하자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으며, 116년 재차 출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23년 왜국(倭國)과 수교하였으며, 125년 말갈족(靺鞨族)의 침입을 백제의 도움을 받아 격퇴하였다.
■ 일성왕(逸聖王 ? ~ 154)
신라 제7대 왕(재위 134∼154)으로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 비(妃)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원래의 칭호는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이며,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말갈족의 침입을 자주 받아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는데, 농사를 장려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전지(田地)를 개간하는 등 농정에 진력하였다. 또 민간에서 금은주옥(金銀珠玉) 등의 사치품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 아달라왕 (阿達羅王 ? ~ 184)
신라 제8대 왕(재위 154~184)으로 성 박씨. 원명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로 키가 7척이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용 모가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 비(妃)는 지마왕(祗摩王)의 딸 내례부인(內體夫人) 박씨. 157년 처음으로 감물(甘勿) .마산(馬山)의 두 현을 두고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다. 165년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하였다가 백제로 달아나자 왕은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백제에서 응하지 않아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졌다. 167년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여 1000여 명의 백성을 잡아가자 군사 2만과 왕 스스로 8000기(騎)를 거느리고 나갔는데, 백제는 포로들을 석방하고 화친을 청하였다. 174년 왜국의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사신을 보내왔다.
박씨왕은 일단 여기서 중단되고 728년 후 53대 신덕왕으로 이어져 55대 경애왕까지 계속된다. 아달라왕의 뒤를 석씨 벌휴왕이 이었고 먼 후일 효공왕(김씨)의 뒤를 박씨인 신덕왕이 이었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초기 기록에 아달라왕이 아들이 없어서 왕위가 석씨로 넘어갔다고 했다가 후기 기록에 신덕왕이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말했다. 김부식의 역사기록에 차질이 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아달라왕이 후사가 없어서 석씨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다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이다 三國史記
三國卷 第二 新羅本紀 第二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벌휴[발휘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다. 그녀는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왕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 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 흉년이 들 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三國史記
卷 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神德王>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父<乂兼>[一云<銳謙>.], 事<定康大王>爲大阿湌. 母, <貞和>夫人. 妃<金>氏, <憲康大王>之女.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 卽位.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예겸(銳謙)’이라는 주장도 있다.]이다. 그는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元年, 五月, 追尊考爲<宣聖大王>, 母爲<貞和太后>, 妃爲<義成王后>, 立子<昇英>爲王太子. 拜伊湌<繼康>爲上大等.
원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서기 184년에 아달라왕을 끝으로 왕권이 타성(他姓)으로 넘어간 후 728년만에 원시반본 (原始返本)하여 박씨가 왕위를 다시 계승, 53대 신덕왕으로 이어져 55대 경애왕까지 계속된다.
■ 신덕왕 (神德王 ? ~ 917)
신라 제53대 왕(재위 912∼917)으로 성 박(朴). 휘(諱) 경휘(景暉).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원손(遠孫), 대아찬(大阿湌) 예겸(乂兼)의 아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 비는 49대 헌강왕(憲康王)의 딸이자 52대 효공왕의 여 동생인데,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 효공왕(孝恭王)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능(陵)은 경주(慶州) 죽성(竹城)에 있다.
■ 경명왕 (景明王 ? ~ 924)
신라 제54대 왕(재위 917∼924)으로 휘(諱)는 승영(昇英)이시다.
신덕왕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城王后),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하여 패권을 다투던 때에 왕위에 올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후당(後唐)에 조공을 바치며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견훤(甄萱)의 압박이 심했으므로 새로 건국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도움으로 견훤의 침공을 격퇴하는 등 전과도 올렸으나,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죽었다. 경주(慶州)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 경애왕 (景哀王 ? ~ 927)
신라 제55대 왕(재위 924∼927)으로 휘(諱)는 위응(魏膺)이시다.
아버지는 신덕왕(神德王), 어머니는 의성왕후(義城王后).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17년(경명왕 1) 경애왕은 917년(경명왕 1년) 이찬(2품 벼슬)으로서 상대등(上大等 신라 최고관직)이 된 후 신라 말기 국세가 쇠퇴한때 즉위하여 왕건(王建).견훤(甄萱) 등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927년 10월에 포석정(飽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취흥 할 때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경주 포석정을 습격했던 견훤은 비빈(妃嬪)을 겁탈하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퇴군(退軍)하니 왕비가 왕의 표제(表弟) 김부(金傅)를 신 라 56대 왕에 앉혔는데 이가 바로 경순왕(敬順王)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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