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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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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봉 한국 초기 교회 설립에 힘쓴 지식인

산농(汕農) 박승봉(朴勝鳳)
한국 초기 교회 설립에 힘쓴 지식인 산농(汕農) 박승봉

한말의 고위관료이며 개화파 인사. 안동교회의 초대장로이다. 호는 산농(汕農)이다. 반남박씨 야천자손 참봉공(東民)의 후손으로, 순조의 외가 직계자손이며 유학의 거장인 박윤원(朴胤源)의 5대손으로, 증조부 주수(周壽)는 예조판서를 지냈고, 조부 제인(齊寅)은 이조. 예조판서, 아버지 통정좌부승지 희양(喜陽)과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18771년 태어났다.
조선말기 내각 수반이었던 박정양(朴定陽)의 사종숙질간이었다. 그리고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朴泳孝) 와도 친척지간이 되는 명문 가문의 출신이다. 그는 한말의 고위관료였고 개화운동에 깊이 관여한 안동교회의 초대 장로 중 한 사람이다. 이처럼 당대의 명문가 자녀답게 유학과 시대 사조에 민감한 학문의 대가다운 학풍을 소지하고 있었다.
1895년 견미 사절단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등과 함께 미국방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4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서구문명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았으며 귀국 후 궁내부협판의 자리에 올라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여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려 애를 썼다.
1907년 이준(李儁)열사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일 때문에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영변에 부임하자 모리스(C. D. Morris) 감리교 선교사와도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지방유림들을 설득시켜 개화운동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남강 이승훈(李昇薰)을 알게 되어 이승훈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부터 박정양의 문하생인 이상재(李商在)와도 친분을 나누게 되어 세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나게 되었다.
이 무렵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이원금, 유승준, 홍재기 등 많은 인사들이 3년간의 옥고생활을 마치고 출감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박승봉도 기독교로 개종하여 처음에는 연동교회에 출석하였다.
1909년에 이르러 그는 연동교회 유성준(兪星濬), 승동교회 이여한(李汝漢), 황기연(黃碁淵) 등과 함께 서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에 안동교회(安洞敎會)를 설립하고 자신은 그 해 안동교회의 초대장로로 장립받았다. 당대에 명문이요 양반인 그가 교회 장로가 되자 일부 양반 계층에서 기독교로 돌아오는 이가 많아 이 교회가 양반교회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장로로서 외부 도움없이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1912년에는 유년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교회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육영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중앙학교의 전신인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설립하여 2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YMCA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일제가 YMCA 침투하려는 공작을 신흥우, 윤치호등과 협력하여 막았고 이를 위한 강연회를 자주 개최 했는데 그 강사가 되어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YMCA를 중심으로한 민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이상재, 김성수 등과 더불어 그 운동의 배후세력이 되었고 제동에 있던 그의 사저는 민족 지도자들의 모의장소로 사용되었다. 이승훈, 이상재, 함태영, 장붕, 권순, 박동완, 김도태, 김지환, 김필수, 박희도, 최인, 오세창, 김동규, 권동진 등이 그의 집에서 3.1운동 거사를 개척하였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검토, 교정된 곳도 그의 사저였다.
그는 같은 교회 성도이며 상해임시정부 행정원 원장으로 일하던 최창식을 통해 임시정부발행의 ‘독립신문’에 자금조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일로 왜경에 감시를 받고 몇 차례 소환명령을 받았으나 큰 수난을 겪지 않았다.
1921년에는 윤치호(尹致昊).이상재.이승훈 등 유력한 기독교 인사들과 같이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였다가 1923년에는 다시 조선기독교 창문사(彰文社)로 발전시켰다. 이러는 가운데 대학을 설립할 큰 뜻을 품고 기성회 조직하여 교육자립을 추구하였다. 순수신앙운동에 전념하지 않고 애국운동에 가담하자 배척하는 이가 나타나 스스로 교회를 떠나 하교교회(河橋敎會)를 설립하였다.
그는 유교 경전 중 예기에 조예가 깊어 《예기 禮記》를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 제사관을 정립하고자 노력하면서 조상제사 문제가 기독교와 일반 사회에서 문제가 되자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사들의 일방적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여 시정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933년 6월 23일 많은 일들을 남겨둔 채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인물은 그 시대를 빛낸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작용한다.
그런 인물이 산농(汕農) 박승봉(朴勝鳳)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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