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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부원군 박용(朴墉)
1468(세조 14)∼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반남박씨 10세손으로. 초명은 호(壕), 자는 중보(仲保).
군기시정(軍器寺正) 치(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춘현감(永春縣監) 성효원(成孝源)의 딸이다. 인종의 장인이다.
1495년(연산군 1)사마시에 합격, 여러 차례 대과(大科)에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거쳐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역임하고 홍주판관(洪州判官)으로 나아갔다가 과만(瓜滿)이 되자 군기시판관(軍器侍判官)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들어왔다.
그뒤 내직으로는 충익부도사(忠翊府都事)·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주부(主簿)·사축(司畜)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울진현령·은율현감을
지냈다.
1524년 딸이 세자빈(世子嬪:仁宗妃)에 책봉되자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되고, 곧 돈녕부부정(敦寧府副正)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특진되었다.
죽은 뒤 우의정 겸 춘추관사(右議政兼春秋館事)에 추증되고,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가증되었다.평소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 반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
1526(중종 21)∼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반남박씨12세손이며 . 자는 건중(健仲). 선조비 의인왕후(懿仁王后)박씨의
아버지이다, 사간(司諫) 소(紹)의 아들이며, 고려말 명문의 후예이다. 아우 응남(應男)과 같이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배웠다.
155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다음해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었고, 1559년에 사복시주부가 되었으나 위법사건에 관련되어 면직되었다.
그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양모상(養母喪)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565년 다시 기용되어 돈녕부주부·내섬시주부(內贍寺注簿)를 거쳐 용인현령이 되었다.
이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딸이 중전이 되자 1569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그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하였다. 평소 검소한 생활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정치에 일체 간여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국구(國舅)가 살아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의(靖懿)이다.
◎ 돈영부 박준원(朴準源)
1739(영조 15)∼1807(순조 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반남박씨19세손이고. 자는 평숙(平叔), 호는 금석(錦石)이다.공주판관을
지낸 사석(師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로 수기(受基)의 딸이다. 김양행(金亮行)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육경(六經)과 백가(百家)의 글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맏형 윤원(胤源)과 함께 서로 학문을 강론하였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그의 제3녀가 수빈(綏嬪)으로 뽑히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거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공조좌랑·보은현감이
되었다.
1790년 수빈이 원자(元子:후일의 純祖)를 낳자 그는 호산(護産)의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호조참의에 임명되었고,
항상 대궐 안에 머물면서 원자를 보호하고 보도(輔導)하였다.
1800년에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하여 호조·형조·공조의 판서와 금위대장(禁衛大將) 등 삼영(三營)의
병권(兵權)을 8년 동안 잡았다.
여주에 있는 그의 신도비(神道碑)는 순조가 친히 지은 것이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금석집》 12권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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