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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반남박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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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및 광역시 지회 소종중, 종친회 종중 구성 이야기 종기 및 휘장 해설
 
 



◎ 종중 구성 이야기 <박찬웅에게 듣는다.>
1991년 8월 31일(토) 개임
11시 반에 종로 3가에서 청소년지도자협회장 박승남씨(64)를 만나기로 했는데 길이 붐벼서 여의도에서 파고다 공원까지 좌석버스로 1시간 반이 걸려 약속시간에 30분이 늦었다. 시간약속을 지키려면 좀 걷더라도 지하철을 이용해야 한다.
이번에 내가 서울 체제 중 토론토에 사는 우리 반남박씨 박천봉 천호 형제의 계파를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아우인 박천복을 만나서 조사해 보니 나와 같은 활당공파 임을 알았다. 그런데 박천복이 박승남을 한번 만나 보라기에 오늘 그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재공 박태보의 직손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반가웠다. 내가 1973년에 < 노들에 지는 별 >이라는 역사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박세당과 태보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 소설을 쓰기 위해 세당 태보 부자의 자료를 조사하고 사적을 더듬기도 했다. 그러므로 내가 쓴 책에는 태보를 모신 노강서원을 노량진에서 수락 산으로 옮긴 얘기도 나오는데 오늘 만난 승남씨가 노강서원을 옮긴 내력을 자세히 알고 있기에 여기 그의 말을 간추린다.
6.25 동란이 1953년에 휴전이 될 무렵 노강서원의 고지기는 그의 부친 때부터 대를 이어 이를 맡아왔던 김영진 이라는 자였다. 원래 노강서원에는 천평의 땅이 딸려 있었는데 정재공(박태보)의 종손이 이 땅을 팔아먹은 것을 민대식의 집안에서 (민영휘라고 추측됨)다시 사준 것이다. 그 이유인즉 정재공이 아니었다면 숙종비 민중전이 복위(1694년)도 되지 못했고 민씨집안이 몰락했을 것이라 해서이다. (300년 후에 은혜를 갚았다니 의리있는 사나이다.) 그때 민씨네가 도로 사준 땅이 370평 이었다.
6.25가 나자 김영진이 노강서원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고 폭격을 맞았다고 꾸며댔다. 승남씨가 가보니까 노강서원 자리에 하꼬방이 17체가 들어서 있었다. 노강서원에 보존돼있던 정재공의 영정도 어느 고마운 부인이 모시고 있다가 돌려주었다. 이 노강서원 370평의 땅은 박씨네 6명의 명의로 등기를 냈는데 그 중 당시 생존했던 분이 두 분이 계셨다. 한 분은 현 도유사 승서씨 부친인 승경씨이고 한 분은 목천의 승렬씨였다. 그래서 승남씨가 이분들을 천안까지 찾아가서 위임장을 받아 승호씨(세양공파)가 부장판사로 있을 때 측량을 다시 해서 3년 걸려 재판을 했다. 그 당시 종중은 무일푼으로 측량 비도 없었다. 노량진 승렬씨(극장 옆에서 직조공장을 했다. 현재 살아있으면 80정도) 집에서 총회를 할 때 참석자들에게 십시일반으로 얼마씩 거두었다.
그 후 종중의 경비를 위해서 승남 남서 승심 등 열명이 매달 2천원씩 냈다. 그 수금은 머리가 하얗게 신 학서 노인이 다녔다. 지금 사셨다면 백 살이되 셨을 것이다.
호양씨가 도유사 할 때인데 종중에 사무실도 없었다. 승하씨가 정릉 자택에 종중서류를 갖다 놓고 사무를 보고 회의 때는 보따리에 서류를 싸 들고 나왔다. 승만 승하 호양씨가 다 다락원 서계자손 동갑네 기들이다. 다락원 박씨란 수락산록 다락원에 살고 있는 서계(박세당의 자손들을 말한다.
노량진 노강서원 대지는 지금 다락원에 살고 있는 박승호씨가 샀다. 그는 승만씨하고 가까운 사이였다. 승호씨는 그 땅을 사서 무허가 주택에 대해 하나 하나 명도 소송을 하느라고 큰 손해를 봤는데 대종중은 그때 들어온 돈을 재무유사 명준씨가 잘 운영하여 들어오는 이자를 가지고 다락원에 서원을 새로 짓고 그 원금과 졸헌공(야천 4남 응복) 위토에서 나온 돈 등으로 중곡동에 땅을 샀다가 재미를 보아 동교동 소재 현 대종중 건물을 사서 이때부터 종중에 기금이 생긴 것이다.<박찬웅 서울1991年>

1991년 9월 3일(화)
6시에 국립의료원내의 Scandinavian Club 에서 박찬호 형(1922년생. 영남대 은퇴. 농학) 그의 동생 찬억형(1926년생. 나와 경기동기 동기) 그리고 박광서씨(1916년생. 중앙대 은퇴. 법학) 를 만났다. 찬호 형제는 나의 16촌 형이고, 박광서씨는 나의 23촌 숙이 되며 일제시대 경성제대 법과 출신이다. 이번 학기에도 대학원 강좌 하나 맡아서 일주일에 한번 중앙대학에 나간다.
우리는 다 반남박씨의 활당공파에 속한다, 작년에 활당공파의 소종중을 만들어서 찬호형이 회장이 됐다. 활당공파에는 3파가 있어 찬호형 이나 나는 큰집에 속하고 광서씨는 셋째 집에 속한다.
광서씨의 부친 박승훈(1888~1964)에 대해서 내가 질문을 했다.
나는 6.25동란 중 통역장교로 남원의 백전투사령부에 근무 할 당시 회의 차 광주에 출장 갔다가 박승훈을 만난 알이 있다. 그때, 그는 육군대령으로 이 회의에 참가했다. 우리 부대 고문관인 Clode 소령과 같이 만난 것이다. 그는 그 후 헌병사령관도 역임했고, 육군소장으로 제대했으며 반남박씨 대종중의 도유사도 지냈다.
박승훈은 원 고향은 장단이고 합방 전에 가족이 수원으로 옮겨 살았는데 아렸을 때 무단 가출하여 부친허락 없이 서울의 무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지청전(1888~1959). 이응준(1891~1985). 홍사익 등이 동기생이고 김석원(1893~1978)은 한반 아래다. 입학식 때 상투를 깍고, 깎은 채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문관 집에서 무관의 길을 갔다고 격노한 부친(후양)에게 쫓겨서 하루도 묵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무관학교 2학년 때 (1910년 22세 때) 한일 합병이 됐다. 일본측은 무관학교 전교생을 시험 쳐서 그 중 47명을 뽑아 일본으로 데려다가 교육시켰는데 거기 박승훈도 끼어 있었다. 일본은 그들을 일단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후 육사로 진학시켰다. 승훈은 일본 육사 24기가 된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 소좌때 대구 80 연대의 부연대장이 됐는데 술버릇이 나빠 약주만 들어가면 『독립가』를 불러 일본군에게 요주의 인물로 짐 찍혀 있었다. 1935년경 중좌 당시 그는 술좌석에서 직속상관인 20 사단장 판환정사랑(板桓征四郞)대장 (후에 육군 대신)이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고 주먹으로 때려 난리가 났다.
그는 파면 당하고 체포령이 내렸다. 중국의 지청천과 관동군 참모장인 홍사익에게 연락을 했더니 양쪽에서 다 봐줄 테니 오라는 기별이 왔다. 그때(1937년) 바로 지나 사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국으로 못 가고 만주로 도망을 갔다.
홍사익은 그를 만군중령으로 특채토록 하여 목단강수군압대장을 발령했다. 얼마 후 노몽한사건(1939년 5월 11일, 일소충돌로 전사자 2만 명)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그를 적 후방에 장교척후로 보냈다. 그는 한달 동안 적지에 들어가 척후업무를 마치고 용케 살아서 돌아왔다. 그는 그 후 만주군의 장군까지 올랐고 만주 신경의 6관구사령부의 참모장이 됐는데 1945년 8.15 해방 6개월 전에 다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때 그의 나이 57세.
광서는 부친 승훈이 대구 80연대부연대장이었던 관계로 일본인이 다니는 대구중학교를 거쳐 경성제대밥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징용을 피해 부산소재 조선항공회사(사장 신용육(후에 자사의 관리부장으로 들어갔다) 거기 일본 해군 앵정(櫻井) 중장이 나와 있었는데 그의 주선으로 광서는 어려운 시기를 부산에서 지냈다.
1945년 2월에 고향 수원을 돌아온 승훈이 부산에 있는 광서에게 돌아오라는 연락을 해서 그는 퇴직금까지 다 타가지고 올라오니까 3개월 만에 8.15 해방을 맞게 됐다. 승훈은 해방 후 다시 한국군에 대령으로 특채됐다. 1948년에 여수 14 연대에서 반란(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대의 여단장 겸 연대장이 바로 박승훈 이었다.
사건당일 연대장이 죽었다고 신문에 보도되자 육군총참모총장 채병덕이 자기를 불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돈을 보내주면서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그래서 관을 짜고 베옷마련 다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범석 총리와 채병덕 총참모장이 같이 광서를 찾아와 부친이 무사하다고 알려왔다.
반도들은 경찰서장 등을 죽여서 로프로 감아 시내를 도는 등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했다. 그래서 박승훈은 부관이 마련해준 어선을 타고 피신을 했다가 며칠 후에 돌아왔다는 것이다.<박찬웅 서울1991年>